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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신비주의(개신교 신비주의)연찬회를 다녀와서

2010.11.2


개신교 신비주의 역사를 개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분명 공손한 요청이었으나, 스승의 요청은 그저 요청일 수 없지요. 왜 나는 그때 단호히 “못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슨 만용과 환상 속에 그토록 무책임하고 무모한 대답을 했던 것일까! 저는 정녕 고통을 당해도 마땅했습니다. 자업자득이었지요. 허겁지겁 옹색한 글을 마무리해 연구소로 보냈습니다. 글의 질도 엉망인 주제에 마감 날짜까지 넘기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발표 당일에 다른 모임과 시간까지 중첩되어 발표시간을 옮겨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저 때문에 행사를 준비하는 분들의 속이 무척 상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머피의 법칙을 환상적으로 실증하면서, 후회와 자책의 돌덩이를 가슴에 담고 발표 장소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지난 토요일(11/30)에 벌어진 일입니다.

<<꼬박 8시간을 점심식사 시간 30여분을 제외하고, 자리에 앉아 발표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한 무서운 공부시간이었습니다. 비록 수가 많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중에도 일부는 중간에 자리를 떠났지만,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그 어려운 내용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저도 허리가 뻐근하고 순간순간 졸음의 위기를 맞았으나, 제법 잘 견디며 모처럼 귀한 공부를 했습니다. 논문 한편 한편이 발표될 때마다, 내용의 깊이와 수준이 만만치 않았지만, 부담 속에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소에 관심은 있었으나, 여러 이유로 아직까지 깊이 공부하지 못했던 주제들에 대해, 국내의 대표적 학자들이 작성한 알찬 논문들을 읽으며, 정말 값진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개신교 신비주의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야콥 뵈메와 퀘이커들, 그리고 한국적 개신교 영성의 금자탑인 이용도 목사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영성의 대가들의 실체가 적절한 사료적 고증과 치밀한 논리, 그리고 막힘 없는 문체로 논문 속에 잘 정리되었습니다. 발표자들의 깊은 영성과 학문적 연륜이 우러나는 수준 높은 강의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거기에 저의 논문은 개신교 영성의 역사를 보다 대중적 시각에서 개괄적으로 서술했습니다. 앞의 논문들이 핵심적 인물들에 대한 세밀하고 심도 있는 분석이었다면, 저의 논문은 전체에 대한 개략적 묘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논문과 강연에도 진지한 관심과 박수로 격려해주신 분들 덕택에 부끄럽지만 저의 발표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극한 부담 속에 참석했으나, 뿌듯한 만족 속에 돌아올 수 있었던 서울나들이였습니다. 종교학의 자리를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고, 개신교 문화에 이젠 너무 깊이 물들어, 그 자리가 무척 반갑고 설레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어색함과 부담이 교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기독교가 중심 주제요, 참석자 대부분도 기독교적 배경을 지닌 분들이었으나, 한국종교문화연구소가 마련한 자리였기에, 여타 개신교 신학회의 모임과는 성격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자기검열체제가 작동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어떤 압력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강의 속에는 설득력 없는 호교론이나 무책임한 자기비하의 자취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정직했고 진지했습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생명 없는 교조적 동어반복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겸손한 자세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유와 진지함에 겸손이 더해지는 순간, 창조의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학문은 본래 그래야 하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신학과 종교학의 만남이 행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신학은 신에게 솔직하고 진지해야 함을 지고의 선으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종교학은 그 방향을 사람에게 틀어, 사람 앞에서 더 정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지나친 도식화지요. 그럼에도 신학과 종교학이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보다 신에게 솔직하고 인간에게 정직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끝으로, 주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겸손하지만 진지하게 발언하고, 방법론적 한계에 대해 근본적이고 날카롭게 지적하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향해 솔직하고 용감하게 아픔을 고백하고 대안을 추구하는 모습들이 객석에서 풍성하고 윤기 있는 질문들로 모아졌습니다. 그 속에도 묵직한 가르침과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어려운 자리를 마련하시느라 수고하신 분들께 이렇게 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 자리의 속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영역에서 귀한 논문을 준비해주신 발표자들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쁜 주말에도 만만치 않은 학문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주신 학문적·신앙적 동지들께도 박수를 보냅니다. 덕택에 저녁 기차에 실은 몸은 피곤했지만, 가슴은 만선의 기쁨에 흥겨워하는 어부처럼 뿌듯했습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배덕만_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dawkmahn@hanmail.net


주요 저서로 <<미국 기독교우파의 정치활동>>,<>, <<한국개신교근본주의>> 등이 있고, 역서로 <<다시
보는 복음주의 유산>>,

<<미국종교사>>, <<급진적 기독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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