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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60호-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 있습니다(문영석)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4. 17:33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 있습니다

2009.6.30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했던 첫해 서울에서의 삶은 마치 독가스 탱크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경기도 어느 산골로 들어온 이후 어느덧 인간이 만든 그림이나 음악조차도 별로 관심이 없어져 버렸다. 각 계절마다 자연이 베풀어주는 놀라운 변화와 환상적인 빛깔을 가히 무어라 표현할까? 이른 봄 파르스름한 연둣빛이 나날이 그 농도를 더해 가고 얼음이 풀린 땅에 생기가 돋아나면 갑자기 하늘과 땅에 울려 퍼지는 온갖 생명의 합창소리는 마치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도, 거기 가득한 것들도 다 함께 환성을 올려라. 들도, 거기 사는 것도 다 함께 기뻐 뛰어라. 숲의 나무들도 환성”(시편 96:11-13)을 올리는 자연의 장엄한 교향악과 더불어 창조의 무도회(dance of creation)를 감상하게 된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자연은 비록 탈 신성화되었다고 해도 중세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여전히 신의 지혜와 영광을 드러내는 매개물이었으며 그 안에서 온갖 종교적 영감을 추출해냈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황금시대 (특히 13-14세기)라 불리는 중세시대 신비가 들의 저작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만큼 자연계 안에서 종교적 영감을 발견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 안에 흔적을 남기듯 하느님도 그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 안에 흔적을 남기신다. 신비가 들은 신을 추구하는데 있어 정교한 형이상학적 이론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사변적, 논리적 사고의 틀을 부셔버리고 온 몸과 마음으로 삶의 직관을 추구하는 종교적 실존주의자들이다. 자연계 안에서 느꼈던 경이와 신비, 서정적인 감각들을 통해 신의 현존을 느끼고 이야기했던 중세 신비가 들의 증언들은 바로 오늘날 지구의 치유를 위한 대안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생태 영성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자연계의 아름다움과 경이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감탄과 찬양, 매혹과 감사로 채운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부 하게 만드는 영적, 창조적, 심미적 가치들을 제공한다. 자연에 무관심한 성직자, 수도자, 신자는 영적으로 빈곤하다. 왜냐하면 자연이야 말로 하느님의 섭리와 자연적 은총을 발견할 수 있는 투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신비가로 불리는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는 영혼이 세상(자연)과 상관없이 하느님을 알 수 있었다면 세상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이야말로 하느님의 책이며 말씀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땅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흔히 어머니(Mother Earth)로 비유된다. 그러므로 자연이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게 되면 자연 속에서 호흡하는 인간도 자연히 생명력을 잃게 되고 시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고, 땅은 그 대가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는 성서의 의미를 현대인들은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하느님의 창조 계획을 거스를 수 있는데, 그럴 경우 땅이 비극적인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탐욕에 눈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의 산과 들이 저주받은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곳곳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파헤쳐진 산야, 썩어 가는 강과 독극물이 흘러드는 하천, 메케한 공기로 뒤덮인 잿빛하늘, 주위의 산천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선을 자극하는 온갖 야한 빛깔로 뒤범벅이 된 조악한 구조물들은 갑자기 졸부가 된 이 나라의 척박한 내적 심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샘플들이다.

사람들은 개발한다는 미명하에 자연스러운 것에 개입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끊임 없이 깨뜨려 왔다. 이미 선진국들은 “슬로 시티”, “슬로 푸드”의 가치에 새롭게 눈뜨고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유행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동안 효율성, 합리성, 생산성을 앞세워 빨리 빨리 만을 강조하는 “패스트”(fast) 운동이 전국을 지배해왔다. 지난 10년간 시골에 살면서 정감 있는 마을의 부드러운 곡선 길, 수초가 어우러진 시냇가와 그 옆에 늘어선 수많은 나무들이 무참하게 잘려져 나가고 대신 획일적인 포장과 온갖 조악한 인공구조물들로 대치되면서 “개발이 바로 악개발”로 이어지는 것을 수없이 체험 하였다. 지금 온 전국이 “4대강 살리기“문제로 극단적인 대립을 하고 있지만 사실 강을 살리는 최선의 방책은 ”그대로 흐르게 하라“는 환경단체의 구호임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투발루 같은 나라가 곧 물에 잠긴다 해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느껴졌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상청은 기후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1961년부터 매년 발표하던 장마 예보를 올해부터 중단한다고 한다. 환경운동가들을 흔히 “종말론 전도사”들이라고 폄하해 왔지만 이제 그 불길한 예언들이 목전에 당도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시점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사상을 현대생태학자들은 생태지역주의(bioregionalism)이라고 표현한다. 소우주인 나(身)는 나를 둘러싼 대우주와 교감하는 열려진 존재이며 땅(土)은 삶의 근거가 되는 모든 자연을 가리킨다. 따라서 불이(不二)란 신과 토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공동체(biotic community)이며 이는 인간이 그 지역 자연환경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과학이 인간 육체의 화학적 구성은 그 질료 면에서 땅과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듯이 성서도 땅에서 인간이 출현했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땅위의 일체 생물이 모두 다 땅에 의존되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인간이란 결국 땅에서 나온 피조물로서 “땅의 백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어느 특정한 땅만이 약속된 복지가 아니라, 지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과 연계된 “언약의 땅”이다. 이 언약의 땅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를테면 불붙은 떨기이다. 하느님은 떨기 가운데서 우리에게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출애 3: 5-6)고 말씀하신다.

문영석_

강남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smoon@kangnam.ac.kr
주요저서로 《Korean and American Monastic Practices: A Comparative Case Study》, 《캐나다이민연구: 역대이민정책의 분석과 전망》등이 있으며 논문《Buddhist Monastic Answer toEnvironmental Problems》, 《성 프란치스꼬와 환경》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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