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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5호- 어느 사제의 죽음과 치유(박규태)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4. 16:39

어느 사제의 죽음과 치유

2009.3.17



지금 돌이켜 보니 그 일본인 교수에게 다 말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몇 가지 떠오른다. 이참에 한국 가톨릭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추기경의 죽음을 되짚어본 조현범 선생님의 지난 2월 24일자 종교문화다시읽기(뉴스레터 42호)를 반추하면서 개인적인 상념을 덧붙여 볼까 한다. 김추기경은 죽음 이후에까지 장기기증 서약자의 급증을 초래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보통사람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죽음이었다. 그런데 추기경의 ‘선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어느 사제의 추도사에 의하면, 추기경의 죽음은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기도 했다. 기나긴 투병생활 가운데 화장실만은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해보려 했지만 결국 그런 자존심마저 다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추기경 정도의 인물도 말이다.

왜 인간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작아지고 초라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늙고 병드는 것까지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수치심마저 접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 그것은 우리에게 “넌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무화(無化)의 뜻을 일깨워주려는 냉정한 신의 선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아무리 가치 있고 위대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품위 있고 고상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애당초부터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회적 신드롬을 낳았던 ‘어느’ 사제의 죽음은 그래서 ‘누구나’의 죽음이기도 했고,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의미의 역설적인 치유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온전한 상태로의 복귀만이 치유의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무화’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치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무화’에 이르는 처절한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경우에 따라 치유는 온전하지 못한 유치함과 혹은 집착하는 욕망의 비참함을 수반한다. 그런 때 “다 나았다”는 “아직도 아프다”라든가 “계속 죽어가고 있다”의 반대가 아니다. 그렇게 고통과 죽음은 치유의 역설과 언제나 함께 있다.

병든 누군가가, 그리고 더 병든 우리 사회가 어느 사제의 죽음 앞에서 흘린 눈물과 감동의 파문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종교현상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겠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추도인파의 물결은 치유를 희구하는 SOS 신호의 파상파를 연상시켰고, 거기서 사회현상은 곧 종교현상에 다름 아니었다. “종교=사회”라는 도식을 제시한 뒤르켐과는 좀 다른 의미에서 말이다. 우리 사회 이상을 실은 종교 그 자체야말로 치유의 역설을 함축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병리현상이 아닌가 싶다. 치유의 역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이자 동시에 끊임없이 종교를 되물어야만 하는 소이연임에 분명하다.

_박규태

chat0113@hanmir.com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과 부교수

<한류담론과 일본문화>, <야스쿠니의 신화>, <저패이메이션과 종교> 등의 논문과 <<종교와 역사>>,<<일본의 발명과 근대>>,<<애니메이션으로 보는 일본>> 등의 저서와 <<국화와 칼>>, <<신도>>, <<세계종교사상사3>>,<<세계종교에서 본 죽음의 의미>>,<<황금가지>>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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