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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3호-감각과 자유(이은봉)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14. 16:33

감각과 자유

2009.3.3



하느님이 우주와 인간 안에서 하는 일을 관상할 때 ‘의지’와 ‘지성’과 ‘사랑’이 구분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의지와 지성과 사랑이 하나로서 현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 세 가지 기능이 구별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 안에서 분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들의 경지에 이르면 이 세 가지 의식의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어 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웬만한 영성가들도 찰나적이긴 하나 ‘은총의 시간에’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다만 항상 지속하기 어렵고 대부분 차가운 의식의 시간에 쫓겨 내려와 분리될 뿐이다.

한국 가톨릭의 영성가였던 고 방유룡신부는 “자유는 의지의 동작이니 의지는 자유로 선을 가리고, 의지는 자유이므로 보다 더욱 좋은 것을 가리는 도다.”라고 읊고 있다. 눈의 동작이 보는 것이라면 의지의 동작은 자유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감각의 문제가 떠오른다.

눈이나 귀나 코나 혀나 수족은 모두 외부 환경과 접하는 우리 육신의 감각 기관들인데, 감각은 육체의 미묘함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감각처럼 미묘한 것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자주 경험하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깨지고 끊임없이 재구성되면서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이런 균형을 이루면 아주 다행이기도 하지만) 감각 외부의 미묘한 현상에 반응하는 몸의 미묘함을 전제로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감각이 있는 한 우리는 외부 세계로부터 떠나 있을 수 없다. 우리 감각을 통하여 세계는 우리와 함께 일종의 공동본질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감각 없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감각은 영혼의 활동 전 영역을 통해, 가장 비천한 것, 즉 아직도 대지에 묶여져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고상한 것, 즉 대지가 그 지점을 잃어버린 것 같은 관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통해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감각은 자신을 하나로 융합하는 과업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포기한다면 내적 충동이 난봉을 피우는 감각의 홍수에 굴복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연료의 부족으로 영적인 불에 타서 소진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대지의 즐거움은 감각에 관심이 있는 것이고 감각은 통합하고 영화(靈化)되어 하늘로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감각을 죄악시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종교 역사는 길게 보면 육체의 충동이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의지가 더 큰 영역으로 확대한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신부는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은 복을 찾으면서 어찌하여 그 길을 모르는지, 동물성과 지성 시대는 지났네, 의지시대는 잇달아 오리.”(『영혼의 빛』영가 66. 말씀은 사랑이시니)

방신부가 내다본 ‘의지시대’는 앞으로 미래에 도래할 시대를 말하지만 인류역사가 그런 과정을 거쳐 왔다는 것을 직시한 것이며, 우리의 영성의 방향을 크게 지시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은봉(덕성여대명예교수, eunblee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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