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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심정이 빚어내는 거짓 문제들..그리고 vice versa


2008.9.16

얼마 전에 번역했던 책 「부록」의 제목이 ‘몸에 맞지 않는 옷 입기’였다. 논지만을 추려 말하면 이 글의 풍부한 재미가 사라지긴 하지만, 그 글에서 다룬 내용은 결국 ‘중국철학’과 ‘유교’를 정의하고자 했던 오랜 문제가 참된 역사와 참된 심정으로 충만해 있지만 사실은 거짓 문제라는 것이었다. 중국인 저자는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용어나 그에 상당하는 관념이 없던 중국인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서구 학문의 세례를 받은 후, 백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타자의 장점이라 여기는 바를 선망하며 우리도 그것이 있다고 주장하였다고 했다. 혹은 타자의 단점이라고 여기는 바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런 것 따위는 없다거나 혹은 그런 단점은 없는 어떤 비슷한 것, 그러니까 더 위대한 것은 있다고 주장했던 학자들의 노력을 그는 담담하게 묘사했다.

양복을 입어보고는 치렁치렁한 창파오보다 활동하기에 한결 편리하다고 느낀 중국인들은 양복 재단을 배우게 되었고, 순식간에 옷가게는 모두 양복을 만들어 파는 집으로 바뀌었다거나, 양복을 중국인 체형에 맞게 이리저리 뜯어고치고 보니 영 양복의 꼴이 아니게 되어버렸다거나, 또 창파오를 이리저리 고쳐서 입어봐야 양복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래도 양복으로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비유를 들면서 이제 철학이나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중국 학계의 백년사를 그려냈다. 이런 상황은 우리의 학계에 그대로 적용될 뿐 아니라, 우리는 한자어라는 한 겹의 막을 또 의식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 글을 읽는 재미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제 중국철학과 유교의 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정의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역사적인 현상에서 출발한다거나 의례 및 제도나 풍속 등에서 출발하는 식의 다양한 접근을 소개하고 있다.

참된 심정이 빚어내는 거짓 문제라는 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20세기 후반의 30년 정도 전 세계의 유교 연구자들이 열중했던 유교와 자본주의의 연관성 문제 역시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교가 타도해야 할 낡은 전통이 아니라 전도유망한 동아시아의 가치 있는 전통이며, 동시에 자본주의 역시 포기할 수 없는 체제라는 판단 하에 많은 유교 연구자들이 이 주제에 뛰어들었고 많은 학회들이 이 주제를 선회하였다. 그러나 이윤의 추구와 창출에 무관심한 것을 지나 선진 시대의 대표적인 유가들은 유교가 추구하는 윤리적 덕목과 이윤 추구가 배치된다는 기본적 방침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는데 유교와 자본주의의 관련성이 왜 그렇게 중대한 학술적 테마가 되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이 역시 참된 역사와 참된 심정이 빚어낸 거짓 문제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된다.

역으로 거짓된 심정이 빚어내는 참된 문제도 없지 않은 듯하다. 신문이나 뉴스를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들도 지금 한국 사회를 후끈 달구고 있는 ‘종교 편향’이라는 말을 한 두 번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종교학 개론이라도 들어보았거나 종교학 관련 서적 한 권이라도 읽어본 이들에게는 지금의 대통령과 일부 공무원들이 그동안 보여준 종교 편향적 언행의 사례들―서울 봉헌 발언으로부터 성시(Holy City)화 운동, 정부 복음화 관련 언행들을 상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은 그저 코웃음이 날 뿐, 문제 삼을 만한 것도 아닐 것이다. 한 성직자가 혼신의 힘을 불살라 자기 주변에 신앙의 불씨를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공직의 권위나 행정력이 조금이라도 동원된다면 그것은 엄연한 사회적 폭력이자 종교적 강압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코웃음 칠 일들이 계속되면서 불교계에서 이를 문제 삼게 되었고 급기야 현 사회의 급박한 문제가 되었다. 물론 불자들 중에는 진정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으리라는 진정한 우려와 근심에서 종교편향을 이슈화하고 이명박 정부 범규탄 대회에 참가하는 분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자칫 잘못하면 현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선출되는 과정에서 보았던 특정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모방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지 모른다. 다종교사회 혹은 종교의 다원화라는 종교학의 낡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이제야 보편적인 이해의 지평에 서게 되는가보다. 어쩌면 종교 편향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거나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종교 등에 따른 차별 없이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하여야 한다”는 추상적인 공무원 복무규정 개정을 시도할 것이 아니라 종교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자 공부해야 할 시점일 것이다.

답도 있고 대책도 세워진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종교가 좋은 것이라고 여긴 이들은 유교에도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종교의 몇 가지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나열하며 유교를 종교라고 주장했고, 종교가 나쁜 것이라고 여긴 이들은 유교엔 그따위 것은 없다고 하며 유교와 종교의 다른 점을 나열했다. 이제 우리는 싫든 좋든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종교박람회가 더 이상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우화집 제목만은 아니게 되어버린 시점에 도달해 있다. 나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종교 편향이라는 문제가 한국의 정치와 언론에 몸담고 계시는 분들, 학술 연구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단지 자기의 입장과 답을 가지고 그 도출 과정을 임의로 재단할 수 있는 거짓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답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토론하지 않을 수 없는 참된 문제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참되기만 하지는 않은 심정이 빚어낸 문제라고 할지라도, 거짓 문제가 아닌 참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연승(한국종교문화연구소, ys122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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