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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종교(학) 사이에서 - 통섭과 전략적 동거


2008.7.22

나의 학문적 정체성을 따지자면 철학과에 소속한 강단철학자로 행세해온 셈이다. 그러면서 내내 고향상실증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왔다. (문학적 감성을 자극할 듯한) 'Heimat' 처럼 (철학적 사유를 유발할 듯한) 'philosophy'나 ‘philosophieren’을 발음할 때 느끼는 묘한 마력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방지대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철학 중심의 분위기 속에서 동양철학은 어쩐지 생소하고 곁방살이가 아닐까. 무언가 엇갈리는 느낌을 지녀왔다. 그러다가 ‘한종연’의 강물로 떠밀려졌을 때 영광스럽다는 가슴 부풀림과 동시에 \'이제 고향에 돌아왔구나‘ 하는 귀향감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이 두 영역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양 다리 걸치기를 해왔다고 할까. 감히 두 가지를 넘나들었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어쭙잖은 먹물이었다. 그래서 수년전 한 발표에서 강돈구교수가 두 영역을 왕래하는 학자를 이중인격자처럼 매도(?)하는 언급을 할 때 움찔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두 분야의 통섭은 황필호 교수와 니니안 스마트(’세계종교‘, ’세계철학‘)에게서 발견된다. 스마트는 ’세계관‘(worldview)으로 둘을 회통시키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의 학문적 정체성을 문제삼고저 하는 것이 아니다. 다급한 교육현실에 대하여, 어떻게 종교학을 대학의 기초학문으로 서게 하느냐를 말하려는 것이다. 이는 국민교양의 수준향상과 종교학 전공자의 일자리에 관련된다. 이것은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대학 울타리 밖에서 생존해야 하는 ‘한종연’의 존재이유가 감소되게 하는 길을 말한다. 원초적 구조적 문제는 왜 우리 대학의 학부에서 분야를 갈라놓고 처음부터 선택을 강요하였는가, 나의 경험으로는 두고두고 원망스러운 일이었는데, 이는 지금에도 과반수이상의 신입생에 해당하는 일이다. 왜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하게 막는가. 그래서 학부제가 차라리 나은데, 타율적으로 강제된 결과이긴 하지만, 장점이 있음에도 학과(분야)이기주의가 발동하여 다시 옛날식으로 복구하고 있는 추세이다.

철학과 종교의 거리에 관해서 말해보자. 과연 여느 두 분야처럼 먼 것인가. 동양의 사상사는, 한국의 경우에서도, 종교전통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샹카라, 주자, 퇴계, 원효가 쉬운 예이다. (박종홍의 ‘한국철학사’를 보라) (금년도 세계철학자 대회의 주제가 된 함석헌도 그 한 예이다.) 서양철학이 개인적 사고전통의 집합이라면 동양은 연면한 종교적 사유전통이다. 서양 학문전통에서 학문의 모태로서 철학이 차지하는 자리를 동양에서는 종교전통이 차지해온 셈이다. 그래서일까 서양 말의 번역어 ‘철학(哲學)’의 ‘철(哲)’은 밝아짐(明) 즉 깨침과 통한다. 인도전통에서 무명(無明) 상태를 해탈하는 종교적 지혜(vidya)를 가리킨다. ‘종교’란 말도 ‘조상(宗, 祖宗)숭배’의 연원을 모르고 종종 ‘(종)마루 가르침’, 즉 학문의 으뜸이나 모태로 토착화하여 해석한 것은 오해에서일망정 동양적 토착화의 시도로 인정해 줄 만하다. 이렇듯 종교의 광맥에서 제련해내야 뿌리 있는 철학이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철학과 종교를 구태여 분리시킨 현행 커리큘럼은 불합리하다. 물론 종교학만의 고유한 영역, 철학만의 고유한 영역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커리큘럼을 확장하여 포함시키면 된다. 실제로 미국에는, 대개 작은 학부대학들이지만, 철학과 종교가 한 학과를 구성하는 대학들이 있다. 이제 과학과 종교 같은 학문 간의 통섭을 부르짖는 시대가 오기도 했다. 하물며 종교학과 철학에 있어서이랴. 적어도 서양어학부(불어, 독어)의 선택적 관계 이상의 유기적 관계의 설정 속에서 자기 위치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종교를 철학의 시각에서 보는 ‘종교철학’처럼, 거꾸로 (신념체계화한) 철학을 종교의 시각에서 보는 ‘철학종교’도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가 가끔 왜 종교 신앙 면에서는 비합리적이고 나약하게 보일까.) 현상학이 종교연구에 기여하는 만큼이나 신비주의적 인식론이 철학의 확대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분야의 상호보완적 통섭이나 회통이 두 분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은 당연하다.

전공을 떠나서 종교지식은 한국사회에서 종교의 각별한 영향력을 감안할 때 대학에서 필수교양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비판적 시각과 건전한 인격형성에 철학지식과 종교이해 어느 쪽이 더 기여할까. 철학적 논리와 지식은 주관적, 직관적, 감성적 결론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기 쉬운 반면, 객관적이고 다원주의적 종교지식은 잘못된 종교이해가 가져오는 평생의 굴레를 벗어나게 할 수 있다. 한국인은 허다하게 지금 미래의 불안으로 인하여 (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이념보다는 (왜곡된) 종교에 더 볼모잡혀있다. (한국, 미국) 대통령의 단선적이고 편향된 종교이해가 자기나라와 여타세계에 고통과 위기를 가져왔다는 사실 이상의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한국대통령의 경우, 한겨레 7월 2일자 성한용 칼럼 참조) 한국사회에서는 철학보다 종교학이 국민교양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역설, 설득해야 한다. (뒤틀린) 조직종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건져내야할 것 아닌가. 이 점에서 지금 선진국대학에서는 교양필수과목이 된 ‘세계종교’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우리 대학이 얼마나 될까. (이런 정보라도 연구소가 갖고 있는가.)

철학과 종교의 통섭이나 전략적 동거는 시장경제화 하는 학원에서 퇴출직전의 홀대를 받고 있는 철학과 종교학 양쪽에 도움이 된다. 윈-윈 게임이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한 전략과 논리개발, 나아가서 실천캠페인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남은 문제는, 누가 나서서 그 과제를 수행할 것인가. 물론 한종련 같은 기구와도 관련된 일이다.

김영호(인하대 인문학부 명예교수, yohokim@hot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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