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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7) ‘문화적 감성’과 소통

한국대학신문 [기획연재] 2014.04.13

 

***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소통부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있어온 일입니다. 다만 그것의 짙고 옅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개념을 분명히 하고 논리도 정연하게 다듬어 더 나은 소통을 이루려는 노력들을 합니다. 그런데도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요즘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브렌트 몽브리의 <종교 이전(Before Religion, Yale. 2013)>이라는 책에서입니다.

1853년, 인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인도인들이 모인 단체에 정부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주소와 병기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교도 단체에 보내는 우편물임.’ 그 단체의 회원인 말콤 르윈이 이에 항의하는 서한을 의회에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의회에 소환되어 의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의원과 르윈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갔습니다.

르윈: “…저는 ‘이교도’라는 용어가 무척 모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원: “그럼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옳은가요?”

르윈: “그저 힌두인 단체에 보내는 우편물이라고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원: “하지만 힌두인들 중에도 기독교도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요?”

르윈: “그럴 수 있습니다.”

의원: “그렇다면 당신이 제기한 문제는 기독교로 개종한 힌두인과 그렇지 않은 힌두인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간과해서 생긴 것인데 이를 정부와 관련된 문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요?”

르윈: “하지만 정부가 비기독교인인 힌두인을 이교도라고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원: “그렇다면 비기독교인인 힌두인을 무어라 부르면 되나요?”

르윈: “힌두교도라고 부르면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도인 힌두인은 힌두교도의 자리에서 개종을 한 힌두인이기 때문입니다.”

의원: “답답하군요. 힌두인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그는 기독교인이지 어떻게 그를 여전히 힌두인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개종을 하지 않은 힌두인은 그렇기 때문에 이교도이지 어떻게 그를 힌두교도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몽브리가 인용한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르윈과 의원 사이에서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라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르윈은 그것을 한 민족이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지니게 된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로 여기지만 의원은 종교란 특정한 교리를 승인하고 수용하면서 그 공동체에 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통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또한 진술의 논리가 만나는 접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르윈은 힌두인들이 중심을 차지해야 마땅할 땅에서 이교도라는 이름으로 변두리에 처하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는 자리에서부터 자기의 논리를 폅니다. 그러나 의원은 무지한 힌두인의 맹목적인 저항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하는 데서부터 자기의 논리를 폅니다.

그러나 몽브리가 제기하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개념의 명료성과 논리의 정합성 여부가 아닙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러한 것을 다듬기 이전에 논의에 참여하는 서로 다른 두 입장이 각기 상대방의 ‘삶의 자리’를 감지하는 ‘문화적 감성’을 가지고 있어야 소통은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러한 ‘감성’은 실은 모호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이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모호해도 개념이전 또는 논리이전의 문화적 감성을 결여하면 비록 개념이 뚜렷하고 논리가 정연해도 오히려 그만큼 소통은 더 어렵게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소통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소통 부재에 대한 비판조차 소통이 되지 않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소통희구가 너무 소박하게 놓치고 있는 ‘어떤 것’을 몽브리가 ‘문화적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출처 링크: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3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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