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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8)별 하나에

 

한국대학신문 [기획연재] 2014.04.20

 

***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이제는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습니다. 나이와 몸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넌지시 가르쳐주니까요. 그런데 어릴 적에는 왜 그리 죽고 싶었었는지요.

이른바 ‘시설’에서 함께 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없지만 그 친구는 트럼펫을 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늘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그가 밤에 공산성에 올라 금강 물이 출렁이는 벼랑 위에서 트럼펫을 불 때면 늘 따라가 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지금 어떤 연주가의 것을 들어도 저는 그 친구의 연주로 듣습니다. 그 친구의 얼굴, 그때 그 산성의 검은 나무들과 그 그림자들, 그리고 희끄무레한 백사장 이쪽으로 흐르던 어두운 강물, 그런 것들이 그 곡에서는 언제나 흐르니까요.

그 친구가 그렇게 나팔을 불고 있는 동안 저는 그 소리를 배음 삼아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는 트럼펫을 불려고 공산성에 올랐던 거고, 저는 밤의 강물을 바라보려고 그렇게 친구와 산에 올랐던 거라고 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탈출’을 겨우 숨 쉬곤 했습니다.

밤의 강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깎인 듯 높은 절벽에 올라 앉아 바로 아래로, 그리고 저만치까지, 마치 그려진 것 같은 폭으로 흐르는 강물의 짙은 고요. 그런데 거기 잔물결의 흔들림 속에서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저는 그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참 자주 그대로 그 강물로 뛰어들고 싶은 간절함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 물속에서는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유영(遊泳)이 가능할 거라는, 그래서 거기에서는 어제도 내일도 없는 다만 깊은 흐름에 나를 맡겨둘 수 있으리라는, 그러다가 두 손을 뻗어 물에 내린 별들을 잡을 수도 있으리라는, 그러면 밤새 별들과의 놀이에서 모든 것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는, 그런 상념에 빠지면 저는 저도 모르게 절벽의 끝을 향해 다가가는 저를 의식하고는 깜짝 놀라 멈춰 서곤 했습니다. 죽고 싶은데 죽기는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별들이 강물에 비쳐 반짝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달이 수면 위에 떠 있다든지 물에 빠진 달을 건진다는 이야기는 익숙해도 별이 강물에서 자기를 물결에 띄워 스스로 깨지며 비춰주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성이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구였는지 사실 그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정말 본 것은 별의 흔들림이 아니라 그저 물결의 작은 몸짓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별이었다고 다짐하고 또 단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별에 대해 지니고 있는 제 어떤 고정관념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는 막연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어쩌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 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별을 보면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시신도 찾지 못한 아버지의 실재를 저는 그렇게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제게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랬겠습니다만 별이 출렁이는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아버지’와의 만남에의 희구가 충동한 가장 정직한 본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저는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을 만났습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

충격이었습니다. 윤동주는 나였습니다. 윤동주는 나를 발언해주고 있었습니다. ‘언덕’을 ‘강물’로 바꾸고 ‘흙으로 덮어버린다’는 것을 ‘물로 흘려보낸다’고 하면 그렇습니다. 별은 시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니, 누구에게나 ‘별의 경험’이 있어 시인에게도 별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읊는 별에 공감하는 독자가 있습니다.

얼마 전, 서해에서 슬픈 소식이 들렸습니다. 아팠습니다. 언제쯤 그 아이들은 별로 떠 강물에 자기를 비추고 언제쯤 그 엄마 아빠는 강물에 비친 깨지는 별들을 안고 자유로운 유영을 할 수 있을는지요. 아니, 언제쯤 옛날 그랬었다는 회상을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하면서 나긋나긋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는지요.

 

 

출처 링크: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3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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