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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살며생각하며](10-마지막회)사탄이 전해주는 지옥 이야기

 

한국대학신문 [기획연재] 2014.05.04

 

***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모호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참혹한 죽음을 맞은 영국의 극작가가 있습니다. 16세기,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던 크리스토퍼 말로우(Christopher Marlowe)가 그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 중에 <Doctor Faustus>란 희곡이 있는데 독일 시인 괴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정본(正本)이 두 종류나 되어 어느 것이 진본인지 말이 많습니다. 그 원제도 실은 ‘닥터 파우스투스의 삶과 죽음의 비극적 역사’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학은 물론이지만 더욱이 영문학에는 전혀 문외한인 제가 말로우를 기억하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문학사적인 흥미 때문이 아닙니다. 우연히 어떤 책을 보다가 그 저자가 피안(彼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의 작품을 들어 자기 이야기를 펼쳤던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를 기화로 더듬거리듯 말로우의 책을 훑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작품에서 말로우는 거기 등장하는 사탄을 통해 지옥을 묘사하고 있는데 제가 잊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지옥은 끝이 없어/ 울도 쳐있지 않아/ 그저 있는 공간이야/그런데 거기 우리가 있으면 그곳이 지옥이 돼/ 그러니까 지옥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는 거지”

천당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는 아득하기 한이 없습니다. 그리고 호칭이야 어찌되었든 그런 피안의 묘사는 문화권의 울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먼 날의 다른 곳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지속하는 이야기여서, 그리고 그처럼 보편적인 이야기여서, 실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죽어 좋은 데로 가는 사람이 있고, 죽어 나쁜 데로 가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런 두 다른 곳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어도 사실이어야 하는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가 있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꽤 추스릅니다. 나쁜 곳으로 갈까봐 고약한 짓이나 컴컴한 생각을 제법 스스로 다스리기도 하고, 좋은 곳으로 가면 더 큰 위로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면서 억울하고 분한 것도 삭이고 삼키면서 스스로 착하기를 지속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천당과 지옥은 이미 있어 우리가 죽음 뒤에 가는 공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잘 견디기’ 위해 우리가 요청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릅니다. 삶의 삶다움을 위한 필요니까요. 아무튼 사람살이는 여기 차안(此岸)에 있고 피안(彼岸)의 세계는 저기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전승내용이고 우리가 지닌 상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로우는 달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피안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옥을 그렇게 말합니다. 그가 사탄의 입을 빌어 읊고 있는 지옥은 실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저 ‘빈 공간’인데 그것은 ‘없다’는 것을 묘사하는 다른 수사(修辭)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지옥은 여실하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서술하는 그 내용이 기가 막힙니다. 그는 사탄인 ‘우리’가 있는 자리가 곧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인 ‘우리’가 없으면 지옥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를 다시 역설적으로 ‘지옥이 있는 곳에 우리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못된 존재’들입니다. 사탄이니까요.

지옥에 관한 이러한 묘사는 흔한 서술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리저리 고약함을 벗지 못하는 인간인데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인간의 현존 자체가 곧 지옥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더 우리를 아프게 하는 말은 없습니다. 아니, 아프다 못해 다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따위 자학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당신의 죽음이 그리 비참하지 않았느냐는 항변조차 말로우에게 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바다의 참사를 겪으면서 그 항변하고 싶은 용기를 잃었습니다. 옳은 말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가 지옥이니까요.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사탄의 마지막 발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천국 아닌 곳은 모두가 지옥이야!” 이 결구(結句)를 희망의 언어로 받아드려야 할지, 아니면 더 심한 절망의 언어로 받아드려야 할지 제 마음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출처 링크: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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