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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민, [21세기 人文學 리포트] 타인의 종교, 비교는 하되 판단은 금물

 

[MK뉴스] 2012.04.06 14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생김새를 장동건이나 이효리와 같은 멋지고 예쁜 연예인과 비교해 볼품없다고 말한다면 기분 좋을리 없다. 비교가 교육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진위(眞僞), 우열(優劣), 추미(醜美)와 같은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비교를 한다면 비교의 당사자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갖기 힘들다.

 

그러한 비교에서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기 십상이고, 자랑이나 비난을 위해 우열을 따지고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말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인문학에서는 비교가 중요한 학문적 도구다. 대부분의 인문학에서는 비교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비교철학도 있고 비교문학도 있으며, 비교사학도 있다. 종교연구에서는 처음부터 비교를 중요한 연구 방법으로 사용했고, 종교학을 비교종교학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문학에서의 비교는 어떤 비교인가?

 

인문학적 비교는 이해(理解)를 그 목적으로 한다. 보다 정확하고 확실한 이해의 한 방법이 비교이고, 비교를 통해 비교되는 대상의 같음과 다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비교의 기준을 가치판단에 두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외국을 여행할 때 음식 때문에 고역을 겪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과는 다른 음식을 먹을 때 음식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기준으로 비교하여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어떤 음식을 주식으로 하는가 하는 기준으로 비교를 한다면, 우리와 다른 음식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우리와는 다른 음식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지리적 차이나 환경적 다름도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인문학의 한 분야인 비교종교학에서 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해를 위한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며 종교 의식이 다르다는 것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다른 문화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의 문화를 향유하고 우리의 전통적 종교를 믿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를 믿어도 같은 국민이고 같은 시민일 수 있다. 심지어 한 가족 안에서도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을 수 있다. 그래도 한 식구이고 같은 마을 사람이며 같은 시민이자 국민일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이웃과 국민의 종교를 이해해야 하고, 이해를 위해 비교가 필요하며, 가치판단이 배제된 비교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문학에서, 비교종교학에서 종교를 비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를 위한 것이며, 그것에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공존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종교가 갈등과 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종교적 갈등을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몇 년 전부터 종교차별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왔다.

 

종교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고, 비교가 이해의 도구가 될 수 있을 때 서로 다른 것의 공존이 가능하다. 인문학적 비교, 곧 이해를 위한 비교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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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13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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