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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시기 종교 연구자로서 언뜻 떠오른 생각 한 가지

 

       

                        
                              

 2015.3.24

 

 

 

        갑골복사를 검토해보면 ‘神’자로 비정할만한 문자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갑골학자들 중에는 상나라 당시에 ‘申’자가 ‘神’자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申’자의 갑골문 표기는 ‘’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글자가 복사 안에서 쓰이는 용도를 보면 십이지 가운데 하나인 ‘申’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갑골복사에서 ‘申’자가 ‘神’의 의미로 사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누군가의 숭배 대상이 되기도 하고 제사의 수용자이기도 한 ‘神’의 의미에 가깝게 사용된 갑골문이라면 단연 ‘示’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示’자는 갑골문으로 ‘’이나 ‘’ 등으로 표현된다. 이 ‘示’자는 갑골복사에서 조상을 비롯한 다양한 신격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

 

 

        ‘申’자와 ‘示’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神’자가 나타난 것은 주나라 금문(金文)이다. 금문에는 ‘申’자와 ‘神’자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각각 ‘’, ‘’으로 표기한다. 금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神’자는 ‘申’자에서 파생된 것이라 한다. 금문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神’자의 자형 분석을 어디까지 수용할지는 다시 따져보아야겠지만, ‘神’자가 ‘人’이나 ‘獸’ 등의 용어와 대비되는 범주로서 주대 이후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문제는 ‘神’자가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의 폭과 파장의 범위가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상황은 서구어 ‘god’을 ‘神’으로 번역한 것이 그저 정확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을 넘어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는 차원에서 오히려 생산적 오류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sacred’와 ‘聖’의 관계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 같다.

 

 

        서양어 ‘sacred’를 ‘聖’으로 번역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별도의 관심이 필요하겠지만, 원래 양자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이미 상식이 된지 오래이다. 외래문화에서 들어온 새로운 개념을 번역할 때는 기존의 언어 가운데서 가장 그럴듯한 용어를 골라서 양자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두 문화의 언어체계가 사물에 대한 서로 다른 분절 방법에 기초하여 성립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피번역어와 번역어 사이에 완벽한 일치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sacred’와 ‘聖’의 경우도 각각 이질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탓에 서로 어울릴만한 필연적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익명의 번역자는 두 문화를 중재하는 매개자로서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 이 두 용어를 기꺼이 연결시켰을 터이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은 번역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종전까지 누구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흥미로운 정황을 펼쳐낸다.

 

 

        ‘sacred’를 ‘聖’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聖’이 지닌 본래의 의미가 망각되고 그 비워진 자리를 ‘sacred’의 의미로 채우는 경우는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사례일 것이다. ‘聖’이라는 개념이 종교학의 연구 대상으로서 부각된 것도 순전히 ‘聖’이 ‘sacred’와 동일시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가령 동아시아 전통문화에서 ‘聖’이란 말의 쓰임새를 살핌으로써 ‘sacred’의 보편성을 확인하고자 하거나 서구의 ‘saint’와 ‘聖人’을 동일선상에 함께 올려놓고 연구 과제를 설정하려는 연구자라면 번역이 형성한 자기장 안에서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전통문화에서 소통되었던 ‘聖’ 개념에 대하여 약간의 주의만 기울여도 ‘聖’과 ‘sacred’의 만남은 우연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두 개념은 차원이 다른 생활세계를 배경으로 해서 형성된 것이다. .

 

 

        그렇다고 이 두 개념의 만남이 아무런 소득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聖’이란 개념 안에서 ‘sacred’를 확인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양자가 지닌 차이의 비교를 통해서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는 결과를 낳는 연구라면 우연한 만남이 낳은 뜻하지 않은 선물이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 ‘sacred’로 인하여 부각된 ‘聖’에 대한 관심은 그 ‘聖’이 탄생한 문화적 토양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정밀한 탐사로 이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연구는 ‘聖’의 의미론적 환경 전체에 대한 파악과 더불어 ‘聖’과 여타 개념들 사이의 의미 연관성을 들추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聖’에 대한 발언은 지엽적이거나 구체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sacred’를 지향하는 동어반복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전통시기의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교학계에 공헌하는 바가 있다면 거기에는 종교학의 제반 개념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도출하려면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서 기존 종교학 개념과 대비되는 재료를 캐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temps82@hanafos.com
최근의 논문으로 〈중국 고대 무교 연구와 기원의 문제〉, 〈종교와 문자: 상대 종교적 매개로서 갑골문의 본질과 기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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