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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지요!”  

       

     

                       
                              

 2015.4.14

 

 

 

 

    [장면 1]
    크리스틴: “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지요?”
    경찰: “이런 제기랄, 듣고 있어요. 듣고 있다고요. 당신의 기분을 이해합니다.
           애가 변했지만, 잘못된 건 없어요. 두 사람 모두가 험한 일 을 겪었지만, 그 애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원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크리스틴: “내 아들이 아니에요.”

    경찰: “대체 왜 이래요? 왜 이러는 것입니까?......애 키울 만큼 벌면서 왜 엄마의 책임을 피하려

            하지요?”

 

 

    [장면 2]
    의사: “키가 달라졌다면서요?”
    크리스틴: “3인치나 작아요.”
    의사: “별로 이상할 것은 없어요. 충격 받으면 성장에 문제가 생겨요.
           스트레스로 척추가 줄어 든 것예요.”
    크리스틴: “포경수술은요?”
    의사: “ 납치범이 아이의 위생을 위해서 시술해주었나 봅니다. 애한텐 큰 충격이라
            그 기억을 지운 거고.......이 모든 게 의학적으로 충분히 설명 됩니다.”
    크리스틴: “내 아들을 못 알아볼 수도 있나요? 난 엄마에요.”
    의사: “그래서 객관성을 잃을 수 있지요. 부인은 예전과 달라진 아이를 극히
           감정적인 눈으로 보고 있어요. 이 아이는 많이 변했어요. 전쟁에 나갔다
           변해서 온 아이처럼 감정에 지 배되는 엄마의 눈엔 그런 변화가 거부감을
           일으켜 아들임을 부인하게 되죠. 진실을 바 꿀 수는 없어요. 내 이론의 객관성을
           확인하고 싶은데 이의 없지요?”

 

 

 

        영화 <체인질링 Changeling>(2008)의 몇 장면에서 오가는 말들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서 주인공 크리스틴이 행정 당국, 경찰, 병원 등과 같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기구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생생히 담고 있다. 경찰은 범인 추적보다는 자기의 권위 유지와 관행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거를 앞 둔 정치가는 자신에게 끼칠 부정적인 영향에 전전긍긍한다. 지식 권력의 표본인 의사는 경찰이 찾아준 아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급기야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기 위해서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서 아무런 모순도 느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지극히 순진한 사람이거나 혹은 의사와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자주, 그리고 절절하게 진실의 부재와 대체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외국 자본과 공권력에 의해 인공 섬으로 조각되고 있는 내 고향 제주도에서부터 원전 파괴로 인해 수많은 난민을 낳고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후쿠시마, 초고압송전탑 건설로 오랜 삶의 터전이 무너져버린 밀양, 안타까운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가 잠긴 진도 앞바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곳곳에서 진실은 거짓과 왜곡으로, 혹은 망상과 집착으로 뒤바뀌고 대체되며, 삶은 절망의 어둠 속으로 내몰린다.

 

 

        공적 이데올로그들은 말한다.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국가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누군가의 희생은 필요하고, 그 가치는 숭고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숭고한 희생의 이념은 좀처럼 그 말을 뱉는 자신과 그의 식솔들을 향하지는 않는다. 희생을 견뎌야 하는 자들은 줄곧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자들이었다. 1년 동안 광화문 네거리에서, 진도 팽목항에서, 안산에서, 굴뚝에서 자리를 접지 못하는 그 비통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데올로그들은 말한다. 경제의 발목을 잡지 말라고, 사회 안정과 통합이 필요하다고, 감정을 추스르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데올로그의 추종자들이 희생의 논리를 수긍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보내고 위협과 폭력을 가한다.

 

 

        반 바렌(Th. P. Van Baaren)은 <희생의 이론적 탐구 Theoretical Speculations on Sacrifice>에서 희생의 네 가지의 기본 형식을 논한다. 첫째, 호혜성에 기초한 선물로서의 희생. 둘째, 상대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어떤 것을 내주는 희생. 셋째, 원초적인 사건의 의례적 반복으로서의 희생. 넷째, 세상을 상징적으로 성화하는 몸짓으로서의 희생 등이다. 그의 말에서 눈이 가는 곳은 희생의 첫 번째 형식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은 선물로서 반드시 그것에 대한 보답이 뒤따르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호혜성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서 희생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처지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선물과 그것에 대한 보답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서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 주는 행위가 공동체를 세운다는 이러한 기본 관념에서부터 호혜성은 발생한다. 이 호혜성은 두 상대자들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예컨대 부와 권력을 지닌 왕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 위에 서게 될 때만 실패한다. 이런 의미에서 희생은 사회학적 실재를 반영한다. 신과 인간 간의 거리가 너무나 커져버릴 때, 호혜성의 이념은 떨어져 나가고, 적어도 배경 속으로 침몰한다. 그 때 선물은 더 이상 공동체를 형성하는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상납 혹은 조공일 뿐이다.”

 

 

        오늘날의 현실세계에서 언급되는 희생은 더 이상 호혜성의 가치를 담고 있지 못하다. 공적 지위를 차지한 자들에게 과도한 힘이 주어져 있기에 그들과 호혜성의 관계 맺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답할 선물도 의지도 없으면서 공적 영역에서 설 자리가 없는 자들에게 선물을, 희생을 요구한다. 진리를 위해서, 국익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안보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그 속에 ‘내’가 설 자리는 없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도구적 이성에 사로잡힌 근대인의 냉기와 타인과의 관계의 빈곤화를 비판한다. “왜곡되지 않은 모든 관계, 유기체 내부에 있는 화해적 요소란 아마, 주는 행위, 선사하는 행위이다. 앞뒤를 재고 계산하는 논리에 의해 선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스스로를 사물로 만들면서 얼어 죽는다.” 효율성과 유용성을 중시하는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는 사열대 위에서 군인의 사열을 받는 지휘관의 모습을 취한다. 그에게 군대의 핵심은 명령(order)이고 곧 질서(order)이다. 군의 사열에서 엇박자와 흐트러짐은 용인될 수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물들의 질서이다.

 

 

        아도르노는 맥락과 삶의 조건에 자리하지 않는 추상적인 보편적 규범의 시대착오적인 성격과 폭력성을 비판한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는 안보와 경제의 규범이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위에 서서 희생을 권하는 도착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기괴하고 끔찍한 현상은 차이의 다양성과 풍요로움, 그리고 그 역동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삶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효율성과 유용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군사적 자본주의의 체제에 기인한다. 그 체제의 수호자들은 어떤 것에 대해 열심히 말을 쏟아내지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말은 재단하고 계산하면서 내뱉는 배경음일 뿐이다. 왜 고통을 겪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왜 듣는 척하면서 자신의 말만 쏟아내는 것일까? 그 이유는, 타인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는 것은 생각에 이르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르네 네스(Arne Dekke Eide Naess)의 말에 따르면 괴롭기 때문이다. 아르네 네스는 오슬로 대학교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 인류의 진정한 변화를 위한 일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매우 쉽습니다. 그냥 앉아 있으세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과 함께 앉아 있으세요.” 상실과 절망을 희생으로 순화하고, 그것으로 고통을 겪는 자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위해를 가하는 뻔뻔스러움과 천박함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난’ 어디를 배회하는 것일까?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laetor@hanmail.net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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