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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55호-“말을 함으로 말을 버린다”(因言遣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2. 3. 16:09

 

“말을 함으로 말을 버린다”(因言遣言)

 

 
news letter No.455 2017/1/31


 

 

 

 

온갖 경쟁을 돌파하고 영예롭게 대학교에 안착한 학생들이 활력 넘친 지식의 소유자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지성은 소통부재란 벽에 막혀있는 경우가 많다. 홀로 공부하며 경쟁의 정점에 오른 서울대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시험답안지에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완벽한 답변을 마련하는 이 학생들이 막상 강의실에서 교수의 질문에는 묵묵부답이고, 토론에도 나서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란 강의의 담당교수는 학생들이 고수하는 “침묵은 금“이란 태도를 깨기 위해 학생들에게 과제를 부여했다. 학생들은 청각 장애인, 일진회 청소년, 재활 프로그램의 성매매 여성을 면담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침묵하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한마디씩 발언하기 시작했고, 남과 공유하고 교감한 체험을 말로 소통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소통 단절의 시대라는 이 시대의 특징이 가치 이념의 차이이거나 빈부격차에서 온 것만은 아니다. 입시를 위한 경쟁이 “홀로 공부하기”와 “나만이 알아야 한다.”는 “홀로주의” 행태를 낳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학생의 머릿속에는 온갖 지식이 꽉 차 있지만, 자신을 표현할 방법은 알지 못한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으니, 소통은 요원하다. 반면 떠버리 노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자신이 겪고 체험한 내용이 차고 넘쳐서 그런지, 남이 듣건 말건 끊임없이 떠든다. 인내를 가지고 듣던 사람은 지쳐서 아예 입을 닫게 된다.


젊은이의 입 닫기와 늙은이의 떠버리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두 가지 형태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대로 “말로 나타내는 것”이 요청된다. 우선 말을 위한 “장”(場)이 필요하다. 이 때, 어떤 여건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할 것이며 또 들어줄 대상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앞의 서울대 학생들의 경우, 그들이 소통한 이들은 장애인, 일진회멤버, 재활여성처럼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소통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벽도 뚫게 만든 것이다. 물론 말로 발설한다고 해서, 대화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말은 하지만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소통 부재가 확인되는 상황은 “우리는 지금 같은 것을 두고 말하는 건가?”(Are we still talking about samething?)라는 영어 농담이 잘 보여준다.


말을 통한 소통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심지어 다르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민주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른 것마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바로 소통인 것이다. 그러나 다름을 공유하는 이런 소통은 이제 이 땅에서 사라진 듯하다. 소통 부재를 온통 몸으로 체현한 이를 우리가 대통령으로 선출한 탓이다. 일찍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말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하였고, 말로 인해 닥칠 어려움을 힘주어 경고해 왔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진리표현의 불가능성을 표현한 화두와 같은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우리 생활주변에서 나의 발언 한마디가 얼마나 사실 및 실제 상황과 동떨어져있는가를 경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한문 불전(佛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나오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말로 인해 말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말을 할 때는 그 말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이유, 또는 주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언견언”은 말하는 것 자체를 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침묵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럼 말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일단 말을 발설하면 말과 말이 지시하는 내용이 존재하게 된다. “인언견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없애기 위해 발언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말의 위험성, 말로 인해 오해되고 빚어질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사태를 의식하며 발언할 때의 말의 현장과 말의 상황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결국 오롯이 남는 것은 나의 한계와 나의 처지에서의 이해뿐이다. 흔히 나만의 생각과 나만의 이해를 잘못된 생각(妄念)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망념이 틀린 생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단지 한계상황에 처한 우리들 각각의 다른 생각인 것이다. 곧 다른 생각과 다른 발언인 셈이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다른 것들을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소외된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소통불능을 극복한 대학생, 그리고 쉴 새 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떠버리 노인이 “인언견언”의 구절 앞에서 나름대로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기를 바라고 싶다.


이민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주요 논문으로 <불교학 연구의 문화배경에 대한 성찰>,<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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