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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점성술: 루터 시대의 말과 이미지



 

           

 

news letter No.459 2017/2/28

  

 


 

2017년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 마르틴 루터의 일명 ‘95개조 반박문’이 나온지 500년 되는 해다. 종교개혁 500주년 이라는 이름 하에 이미 작년부터 세계 각지에서 여러 학술 행사와 전시회 등이 기획되고 있는 와중에,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미국 뉴욕의 모건 도서관과 박물관(The Morgan Library & Museum)에서는 “말과 이미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Word and Image : Martin Luther’s Reformation)”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무엇보다도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미디어의 변혁에 힘입어 진행되었으며, 이때 단순히 성서와 문자 인쇄물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 인쇄물들이 쏟아져 나오며 당대의 종교와 사회에 관한 시각의 첨예한 대립점들을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전시회에 대한 기사를 쓴 뉴욕 타임즈 기자는 “트위터의 시대 한참 전에, 마르틴 루터는 미디어의 선구자였다”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그러니까 1917년, 루터의 반박문으로부터 400년이 되던 해에 이미 독일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는 루터 시대의 말과 이미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이 강연의 원고들을 정리해서 “루터 시대의 말과 이미지에 나타난 이교적 고대적 예언(Heidnisch-antike Weissagung in Wort und Bild zu Luthers Zeiten)”이라는 논문으로 출판했다. 이 논문에서 바르부르크는 루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신학자였던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이 당대의 유명한 점성술사 요한 카리온(Johann Carion)에게 쓴 편지를 인용하며, 멜랑히톤이 카리온에게 딸의 별자리 및 게자리 위에 출현한 혜성의 의미 등을 묻는 등 점성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냈다는 것을 보여줬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대변하는 멜랑히톤이 고대의 미신처럼 여겨지는 점성술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바르부르크는 멜랑히톤에게 인문주의자,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점성술을 적극적으로 정치에 활용하는 저널리스트의 모습이 다 공존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멜랑히톤의 이러한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루터의 출생일을 둘러싼 논란이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그 다음해, 즉 1484년은 오래전부터 점성술에서 목성과 토성이 전갈자리에서 겹쳐지면서 불길한 대 변화를 가져올 해로서 예언되고 있었다. 이 예언을 이용해서 이탈리아의 점성술사 루카스 가우리쿠스(Lucas Gauricus)는 루터의 생일을 1484년 10월 22일로 조작한 호로스코프를 만들어 퍼뜨리며 루터가 큰 재앙을 가져오는 자라는 비방을 부추겼다. 점성술에 대해 거의 언제나 강한 불신과 반대를 표명한 루터 자신은 이같은 소문이 터무니없는 조작이라고 말했지만, 루터의 가장 측근이자 동지인 멜랑히톤은 놀랍게도 꽤 오랫동안 루터의 출생일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오히려 1484년을 더 선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즉 그는 점성술사 가우리쿠스의 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484년이라는 해에 대한 다른 해석, 즉 이 때 재앙이 아닌 중요한 개혁을 이끌 선지자의 탄생이 이뤄졌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점성술을 종교적 정치적 투쟁에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루터와 멜랑히톤의 의견차가 있었지만, 점성술적 이미지를 활용해 여론을 형성하고자 시도에는 루터 역시 어느 정도 관여했다. 15세기 말부터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던  리히텐베르거(Johannes Lichtenberger)의 예언서에는, 두 수도사가 서 있고 그 중 한 수도사의 어깨 위에 작은 악마가 올라가 있는 목판화가 실려 있었다. 어깨 위에 악마를 얹은 이 수도사는 보통 재앙을 가져오는 ‘거짓 예언자’로 해석되었고, 루터가 로마 교회에 반기를 든 이후에는 교황의 지지자들이 이 거짓 예언자 수도사를 루터로 해석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자 오히려 루터는 1527년 이 예언서가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다시 출판될 때 여기에 직접 서문을 써서, 이 수도사의 어깨 위에 있는 악마야 말로 경건한 수도사를 공격하려는 악마, 즉 교황과 그 지지자들이라고 반박했다. 

 


 

점성술, 예언과 관련되어 기형적 동물의 출현을 묘사한 이미지들 역시 당시에 논쟁적으로 사용되던 이미지들이었다. 1490년대 로마에서 나온 소위 ‘교황 당나귀’ 이미지와 1522년 작센주에서 태어난 기형적 송아지를 ‘수도사 송아지’로 묘사한 이미지는 그 대표적인 예다. 멜랑히톤과 루터는 이 두 이미지에 각각 자신들의 해석과 주석을 첨부한 문서를 만들었다. 이 문서에서 멜랑히톤은 ‘교황 당나귀’의 기형적 형태가 교황권과 로마 교회의 타락의 상징이라 주장했고, 루터 역시 ‘수도사 송아지’의 기형적 형태는 사제들의 타락과 직권남용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교황 당나귀’가 여성의 몸을 취하고 있는 것에는 좀 주목해봐야 할 것이다).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가 제작한 ‘교황 당나귀’와 ‘수도사 송아지’의 목판화 이미지에 루터와 멜랑히톤의 주석이 첨가된 이 문서는 1523년 한 해 동안 열 번이 넘게 출판되었고, 종교개혁 시기의 가장 널리 알려진 논쟁적 이미지가 되었다. 


 

바르부르크는 종교개혁시기에, 기이한 자연현상에 대한 오래된 공포와 예언이, 이제 새로 시작된 인쇄술이라는 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유럽 전역을 날아다니며 서로 다른 종교적 정치적 이미지로 전유되어 해석되는 ‘슬로건 이미지 (Schlagbild)’의 시대가 열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바르부르크가 살았던 당시, 즉 세계 제 1차 대전 시기에도 이미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강력한 정치적 선전선동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바르부르크의 논문 후반부는 뒤러의 목판화를 분석하며, 뒤러와 루터의 태도를 고대적 이교적 점성술의 세계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인간 이성의 노력으로 바라보지만, 그러나 그는 끝끝내 신화적 세계가 이성과 합리적 사고의 세계에 의해 극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를 고대의 미신적 이미지의 세계가 근대의 이성적 말의 세계에 의해 극복된 시대로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그릇된 사고인지 보여주면서, 불안한 사회 속에서 고대의 종교적 이미지들, 과거의 유령들이 끊임없이 소환되며 이들이 저마다의 서로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재인용되고 재생산되는 모습을 감지했다. 그리고 바르부르크가 감지한 이러한 현상은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단지 이전 시대와는 또다른 새로운 미디어들이 이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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