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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66호-지령 31호를 맞이하여(종교문화비평)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4. 18. 19:58

 

지령 31호를 맞이하여



news letter No.466 2017/4/18

 

 

 

 

 

 

 

 


이번 호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년 하반기 심포지엄 주제인 <동아시아 의 제의와 희생>을 특집으로 묶었는데 책을 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든다. 한국 종교문화연구소에 뒤늦게 동참한 나로서는 이 연구소의 설립 동기나 활동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기관의 얼굴이라 할 《종교문화비평》의 창간 이후 30호까지의 내용을 검토할 때 내 나름의 평가를 하기에는 부족함 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호 권두언에서 이 모임의 창설의 축(軸)이라 할 정진홍 교수는 통권 30호 발간과 관련하여 감회어린 소회를 피력하였다. 이분의 지적은 거의 증언에 가까웠다. 이제까지의 실적에 대한 평가와 희망사항이 뒤섞인 발언 곧 이 저널은 “자료의 보고”이며 “지식의 궁전”으로 “권위”가 지탱되는 것 을 목표로 하여 이끌었고 앞으로도 이 기조는 “이어짐과 열림” 그래서 “새로운 연구”라는 지표를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런 가이드라인에 입각하지 않으면 모든 연구 활동이 소수 전문인의 세계에 갇힌 “유치한 공동체”로 끝날 수 있음을 경책하는 글이었다. 곧 전문 용어(jargon)와 그들만의 지적 유희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위험을 항시 망각하고 똑같은 실수, 또는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자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곤 한다.


이번 특집을 위의 가이드라인에 비추어 보면 어떻게 될까? “동아시아에서 의 제의와 희생”이란 주제는 참신한 주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거나 지나치게 전문화된 제목은 아닌가? 희생제의(sacrifice)는 종교학의 기본 소재이기도 하고 종교학적 접근의 여러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선정된 주제가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면 참신성이 없고 이미 많이 다루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 용어 자체가 서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럽종교는 물론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인도와 아프리카 문화권의 종교의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구적 의미의 희생제의라는 개념을 미리 설정해 놓고 현상들을 그 개념으로 환원하는 작업을 하지는 않았는가? 곧 희생제의란 틀을 가지고 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유사현상들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던 것은 아닌가? 주최 측에서는 하반기 심포지엄 주제를 선정하면서 이런 위험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또 하나의 위험은 기왕 다루었던 주제의 되풀이에 관한 것이다. 어떤 학술단체에서 이미 내 걸었던 주제는 더 이상 되풀이 하지 않는 것이 학계의 관행이다. 한번 다루었던 주제는 이미 해결을 본 것으로 간주하는 학계의 피상적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학술 발표를 통해 새로운 문제점들이 떠오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천착할 소재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같은 주제를 계속 검토하는 작업은 사실상 매우 필요하다.


따라서 주최 측에서는 예상되는 이러한 위험들을 극복하기 위해 발표자들에게 기존의 연구 성과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작업에 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매우 어려운 이러한 주문에 발표자들은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기존 연구의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도발적 작업을 시도하였다. 발표자들의 노고에 새삼 감사 한다.


기존의 서구 중심적 개념에 의하면 희생제의는 초자연적 수용자, 희생제물, 의례집전자의 3요소로 구성된다. 그런데 첫 번째 논문인 이연승의 “중국 고대의 흔례(禮)에 대한 소고”에 의하면 흔례에서는 초자연적 수용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흔례의 피는 무엇인가 작동시키는 힘을 발휘하면서 ‘초월자가 결여된 초월’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처럼 수용자 없는 동아시아적 희생제의는 단지 ‘무엇의 결여’라기보다는 서구적 개념의 한계와 그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이욱은 제사=희생제의라는 등식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죽임과 피를 통해 바치는 서양적 희생제의는 메와 국, 쌀밥으로 드리는 동아시아의 제사와 어떻게 관련되며, 제사와 희생제의를 동일시 할 때 생겨나는 불편함과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고 있다. 더 나아가 탈희생제의화함으로써 희생제의를 상대화시키는 동아시아적 제사의 변용은 희생제의의 범주에 귀속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러한 물음들은 희생제의 개념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유교의례에 대한 이욱의 시리즈 연구의 또 하나의 결실로 생각된다.


중국 상대 갑골문에 대한 임현수의 논문 역시 그의 시리즈 연구의 하나로 보인다. 이번 글에서는 갑골문에서 수렵, 목축, 제사에 관한 자료를 뽑고 이것들이 동물, 인간, 신과 맺는 관계를 따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수렵, 목축, 제사는 삶에 무질서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힘의 영역을 통제하는 수단들이다. 곧 수렵과 목축은 인간이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동물을 길들이는 중요 수단이 되는 반면, 동물은 제사에서 폭력을 통해 살해되어 ‘희생’이 됨으로써 인간과 신의 메신저라는 새로운 위상을 차지한다. 따라서 고대적 삶의 틀로서 희생제의는 인간, 동물, 신의 위상의 교체를 지시한다는 흥미로운 해석이다. 일독을 권하고 싶다.


도교의 제사를 다룬 최수빈의 글은 전통적 방식인 혈제나 동물희생을 통한 기복의 지속을 예상하고 있으나 오히려 정통 도교가 그런 것을 거부하고 경전이나 문서를 제물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탈희생제의의 사례인 셈인데 이 의례에서 차지하는 도사의 위치는 일반제사에서 제주가 차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도사에게서 초월적인 것과의 소통, 영적 여행, 우주창생이 재현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적 희생제의와는 전혀 다른 예와 마주하면서 또 다른 해석의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 논문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만큼 철저하게 원자료에 근거한 독창적인 분석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희생제의’는 종교학의 오랜 주제이지만 이번 특집에 실린 글들은 기존 학설을 재평가하도록 만드는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학술대회의 제목이 “매력적(sexy)”이어야만 한다는 피상성을 넘어섰다고 자부하고 싶다. 나아가 미시적 소주제를 통해 기존의 거대학설을 뒤집는 최근의 연구경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어 또 한번 발표자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싶다.


이번 호 연구논문은 네 편이 게재되었는데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다. 각 논문의 주제와 특징, 서술방법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독자들이 읽기에 매우 즐겁고 상당한 지적 흥미를 선사한다는 점이 될 것이다. 최정화가 다룬 인지학(Anthroposophy)은 서양의 불교 수용이나 동아시아 불교의 근대적 변용 과정에서 신지학(Theosophy)이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간 심심치 않게 소개 되었다. 따라서 블라바츠키나 올콧과 연관된 글들이 많았다. 그러나 신지학을 몸통으로 한 인지학이 서양에서 영지주의(Gnosticism) 전통을 이은 신세대의 치유학으로 발전하는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 논문이 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불교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지금까지의 신지학 이해에 균형을 잡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둘 필요가 있다. 불교자료를 다루는 나로서는 특히 그렇게 느꼈다.


이창익의 글은 매해 삼성, 애플, 엘지(LG)의 신종 기기의 출현을 기대하는 사람뿐 아니라 실제로 이 기기들을 사용하는 종교학자라면 꼭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AI)이 기기 사용자들의 상투어라면 인공지능에 의한 포스트 휴머니즘이 논의될 터이고 그에 따라 포스트-갓(post-god), 포스트-릴리전(post-religion)도 응당 논의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창익은 유려하고 재미있게 논의를 전개한다.


박상언의 논문은 자살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를 한걸음 더 진척시킬 것을 요구한다. 자살에 관한 수많은 통계, 자살공화국 한국이라는 불명예스런 호칭, 그리고 한국의 종교 가운데 가장 많은 신도를 지닌 기독교. 이러한 현실에서 자살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기독교, 아니 모든 종교가 자살을 금한다는 단순한 교리로 자살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따라서 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종교적 형성회로에 주목하면서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논지다.


마지막으로 김태연은 ‘신종교’라고 하는 용어 혹은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제도종교들이 신종교를 ‘사교적’ 혹은 ‘일탈된’ 종교현상 등으로 쉽게 처리하는 등 ‘신종교’라는 용어가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 용어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더욱 한국에서의 신종교의 등장은 서구에서의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사회,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있다. 따라서 나 자신도 근대불교는 “신종교” 현상인가라고 물으며 현대불교를 신종교로 다루고 있지만 정작 신종교에 대한 정의는 나만의 개념설정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종교 기행란을 읽을 때마다 종교현장의 생생한 느낌을 접하게 된다. 기행란은 독자들에게 문헌을 벗어난 현장감을 그대로 전달하는 순례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호 송현강의 기행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이다. 종교 기행으로 분류됐지만 충청도의 기독교 정착사와 같은 자료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 기행이라기보다 한국 기독교사 서술을 위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글이다.


설림 란은 필자가 항시 애정을 지니고 읽는 글이다. 학문이란 틀을 벗어난, 그리고 학문을 통해 침전된 찌꺼기들의 낙수라고나 할까, 무르익은 학문의 누룩과 같이 느껴지는 글들이 설림이다. 집필자들의 개성이 표백되고 있으며 내용 역시 천차만별의 것이지만 전달되는 느낌은 무르익은 과일과도 같다. 이번호 역시 다르지 않다. 조경만의 “연어와 함께 여행하기”는 일종의 문자가 결여된 문화사이며 사물만을 통한 문화서술이 가능함을 보여준 글이다. 인간과는 다른 종(種)이 펼치는 문화가 어떻게 존재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연어를 통해 본 인간 문화사이다. 거의 에세이 문학의 백미라 할만하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학술지가 상재(上梓)되었다. 우리 종교학계의 증인인 정진홍 교수가 지적한 모두(冒頭)의 우려가 극복되고 즐겁게 읽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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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종교문화비평>31호(2017년 3월31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 입니다.

 


이민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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