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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72호-우리 곁의 괴물들, 타자와 혐오 감정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5. 30. 19:17

 

우리 곁의 괴물들, 타자와 혐오 감정 

     


 

                    news  letter No.472 2017/5/30

 


 

“이 불가사의한 동기는 다른 모든 동기들을 곱한 숫자보다도
훨씬 큰 소수(素數)라서 그 무엇으로도 나눌 수가 없다.” (모리 히로시)

 


       지난 주말에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영화를 보러 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 에일리언이 아니고 에이리언이란다. ‘커버넌트’라고 되어 있어서 뭔가 했더니 히브리 바이블에 나오는 신과 인간의 약속, 바로 그것이었다. 뭔 소릴까? 에일리언과 인간이 계약을 맺는다? 더 이상 너희를 죽이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도 약속을 지켜라? 아니면 미지의 존재와 인간이 모종의 계약을 맺었었는데 인간이 그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에일리언을 만들어 인간을 죽이라고 보냈다? 둘 다 아니었다. 역시 내가 낚인 거였다. 내 직업 정신이 빚은 오판이었다. 머나먼 행성을 식민 개척하러 가는 우주선 이름이었다. 왜 하필 커버넌트? 약속의 땅을 찾아간다고? 좌우간 이 떡밥은 속편이 나와야 회수될 듯하다.

       나는 1979년부터 1997년까지 나온 네 편의 에일리언 시리즈를 다 보았다. 심지어 우주 괴물 에일리언과 우주 사냥꾼 프레데터를 대결시킨 영화도 있다고 해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에 본 영화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까지 보았다. 이 정도면 에일리언 마니아를 자처해도 되지 않겠나 싶다.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영화의 줄거리를 자세하게 말하지는 않겠다. 이를 스포일러라고 하던가?

       에일리언 1편을 만들었던 리들리 스콧은 왜 다시 에일리언 영화를 만들었을까? 자기 영화 이후에 나온 후속편들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을까? 현재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은 기원이나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종말 이야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왜. 선과 악의 싸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결말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치면 흥행에 참패할 때까지 계속 만들어진다. 분명히 죽였다고 믿었던 괴물들은 계속 되살아나서 인간을 위협한다. 그래서 종말 이야기의 끝판왕은 시간과 공간의 완전한 소거인지도 모르겠다.

       이에 비해서 기원 이야기는 사태의 원인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다. 원래는 이랬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는 기원의 이야기이다. 외계인이 자신의 DNA(마치 Imago Dei처럼!)로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를 모방하려고 AI를 만들고, 이번에는 그 AI가 다시 …. 그러나 실제 영화에서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아마 나머지 미회수 떡밥들을 위해서 몇 편 더 만들어질지 모르겠다.

      기생충, 파충류, 숙주 자체를 파괴하는 무차별적인 공격성, 기이한 구강 구조, 산성 피, 끈적거리는 타액. 에일리언의 어떤 점이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통상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특별히 공포, 혐오 또는 회피의 감정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상의 범주에는 무엇이건 들어갈 수 있다. 괴물일 수도, 종교적 소수자일 수도, 혹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일 수도 있다. 문제는 반사작용처럼 생겨나는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다. 내가 에일리언 시리즈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관심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 전날 학술 발표회에서 강탈(?)했던 후배의 학위 논문(구형찬, 「민속신앙의 인지적 기반에 관한 연구」)을 읽었다. 괴물 상징(아차, 상징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지. 상징과 실재를 나누는 구분 도식도 학자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면서. 이젠 낱말 하나도 무심코 쓸 수가 없게 되었다!)의 인지적 기반에 대한 연구는 아니었지만, 에일리언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설명하는 데에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중요한 구절들을 메모하였다.


 

 “종교문화에서 흔히 발견되는 초자연적 행위자에 대한 관념이나 의례적 행동은 인간 마음에서 작동하는 행위자 탐지체계, 대상의 심리적, 물리적, 생물학적 상태를 파악하는 직관적 추론체계, 사회적 상호작용과 관련한 추론체계, 오염 회피체계, 기억 체계 등 다양한 인지체계들의 정상적인 작동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수적인 효과로서 발생할 수 있다.” (69쪽)

 “그런[초자연적 행위자] 관념들은 ‘사람’, ‘동물’, ‘식물’, ‘자연물’, ‘도구’ 같은 기본적인 존재론적 범주들에 대해 우리가 자연스레 직관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성질을 최소한으로만 위반하는 특성을 패턴으로 갖고 있다. 직관을 벗어나는 정도가 커서 너무 낯설어 보이는 표상들은 기억하는 데 노력이 많이 들고, 직관적 기대를 전혀 위반하지 않는 표상들은 너무 흔해서 특별한 인지적 효과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 주목되지도 않고 이후에 회상될 가능성도 적다. 이와 달리 어떤 범주에 대한 직관적 기대를 최소한으로 위반하는 표상들은 그 인지적 노력에 비해 생산되는 효과가 매우 커서 곳곳에서 유사한 형태를 빈번하게 환기시키거나 상대적으로 잘 기억된다.” (100-101쪽, 192-195쪽)


      이 논문에서 초자연적 행위자의 예로 드는 것은 의도와 욕망을 가지고 있고 표현도 할 줄 안다는 점에서는 ‘사람’과 같은데 육체만 없는 존재인 영혼, 뒷산 중턱에 오랜 세월 뿌리내려 살고 있는 ‘나무’인데 사람의 말을 듣는 존재인 신목(神木)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렇게 보면 에일리언에서 내가 느끼는 공포와 혐오의 감정은 친숙한 범주들과 관련된 직관적 기대를 위반하는 표상들이 가져다주는 인지적 효과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 타자 인식은 인지체계와 뗄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회적 존재에 대한 배타 감정은 어떨까? 통합진보당 사태 때도 그랬고, 지난 대선 때도 그랬다. 권사님의 중얼거림이 충격적이었다. “암만 그래도 거개는 빨갱이라 카던데.” 그 동기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처음에 에일리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괴물에 대한 공포와 혐오 감정을 좀 더 넓은 지평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종교나 문화라고 일컫는 영역, 혹은 사회적 삶 전반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분류되는 사람이나 사물의 집합에 대해서 말이다. 흔히 타자(他者)라고 부르는 존재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인식의 구조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을까? 타자 인식의 문제는 박사 논문을 쓸 때부터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공부 주제 가운데 하나다. 지금도 부지런히 생각의 알갱이들을 모으는 중이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때를 준비하면서.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선교사와 오리엔탈리즘>, <한국사회와 종교적 타자성의 인식논리>, <선교와 번역>,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서학 인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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