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485호-규슈 속의 한국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8. 29. 17:35

 

규슈 속의 한국  

    

 

   news  letter No.485 2017/8/29


 

 

 


       규슈올레길을 걷기 시작한지 벌써 4년째이다. 2011년 사단법인 제주올레와 규슈관광추진기구 사이에 제휴 협약이 체결되어 2012년 2월 제1호 규슈올레 다케오(武雄)코스가 개장된 이래 현재까지 규슈에는 17개 트래킹 코스가 오픈되어 있는데, 그 중 16개 코스를 아내와 함께 완주했다. 한 코스당 보통 4,5시간 소요되지만, 내 경우는 주변의 신사와 사찰 및 유적지를 꼼꼼히 보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걸리기도 했다.


       일본열도 중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지역이 한일교류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야요이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에서 7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일본에 건너간 한국 이주민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규슈 북부였다. 그곳은 세토내해를 거쳐 오사카, 나라, 교토 지역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다. 그런 만큼 규슈 지역에는 고대 이래 한국과의 인적 교류를 비롯하여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교류를 말해주는 고분과 산성, 유물과 유적, 신사와 사원, 비석, 지명 및 기타 고유명사 등의 흔적들이 수없이 많이 산재해 있다.


       한일교류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사가현 간자키군(神崎郡)의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역사공원을 들 수 있겠다. 1986년에 발굴된 약 12만평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마을 유적인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은 2300년 전 고조선과 삼한시대 사람들이 집단 이동하여 청동기문명과 벼농사를 전해주어 일본사에서 야요이시대가 열리게 된 바로 그 현장이다. 일본 고고학계는 한국신 세형동검, 잔무늬거울(多紐細文鏡), 한반도계 민무늬토기, 한국식 옹관묘 등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이 대부분 한반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밖에 ‘가야 주민들의 마을’을 뜻하는 가라케향(辛家鄕), 신라계 아카조메씨(赤染氏)가 대대로 신직을 맡아온 가와라(香春)신사, 백제 성왕의 후손인 오우치씨(大內氏)가 건립한 하코자키궁(莒崎宮), 한국인의 후손으로 헤이안시대에 정승을 지냈던 스가와라노미치자네(菅原道眞)를 학문의 신으로 제사지내는 다자이후덴만궁(太宰府天滿宮), 백제식 산성인 수성(水城)과 대야성(大野城)[이상 후쿠오카현], 신라신 하치만을 모신 우사신궁(宇佐神宮), 한국에서 건너간 어느 여성이 신격화되어 제사받고 있는 히메시마(姫島)의 히메코소신사(比賣語曾社)[이상 오이타현], 왕인박사를 모신 와니덴만궁(王仁天滿宮)[이상 사가현], 백제 무령왕의 탄생지인 가카라섬(加唐島), 가야계 유물이 다수 출토된 이키섬(壱岐島)의 가라카미(可良香美)유적지, 신라신을 모신 쓰시마섬(對馬島)의 시라기(新羅)신사[이상 나가사키현], 백제 임성(琳聖)태자가 처음으로 일본에 도교적 성(星)신앙과 영부(靈符)신앙을 전한 야쓰시로(八代)신사[구마모토현], 고령 가야산의 옛 이름인 우두봉(牛頭峰)에서 비롯된 이름인 가라쿠니우즈미네(韓國宇豆峯)신사, 단군을 제사지낸 다마야마(玉山)신사, 박혁거세가 제신이었던 고세(居世)신사, 백제 정가왕(禎嘉王)을 모신 구다라(百濟)마을의 미카도(神門)신사[이상 미야자키현], 나아가 수백 여 점에 이르는 신라 및 고려의 불상과 종, 조선시대 불화와 지장상 등은 규슈 속의 한국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의 집락지에 붙여진 당인정(唐人町)이나 고려정(高麗町)과 같은 마을 이름이라든가, 약탈해온 수원 벽운사의 편액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다케다시(武田市)의 벽운사(碧雲寺), 혹은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한 일본인이 명성황후의 공양을 위해 세운 후쿠오카시 소재 절신원(節信院)의 관음상처럼 어두운 기억을 환기시키는 상흔도 있다. 혹은 그 반대로 근세에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구마모토학파라든가, 조선통신사가 사용했던 의장기에서 비롯된 유명한 하카타 기온마쓰리(博多祇園祭)의 상징으로 후쿠오카시 구시다(櫛田)신사에 소장되어 있는 청도기(淸道旗)처럼 건강한 기억의 편린도 존재한다.


       이에 비해 규슈의 도자기문화는 우리에게 무언가 뿌듯하면서도 착잡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포로 도공들이 창출해낸 가라쓰야키(唐津焼, 나가사키현), 아가노야키(上野焼, 구마모토현), 다카토리야키(高取焼, 오이타현), 사쓰마야키(薩摩焼, 가고시마현) 등은 오늘날 일본 도자기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우뚝 서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그 중에서도 1616년 일본 최초로 도자기를 구워낸 이삼평(李參坪)의 아리타야키(有田焼, 사가현)가 단연 돋보이는 것은 그를 도자기의 신으로 제사지내는 도잔(陶山)신사의 존재 때문일까? 이삼평의 잔상이 곳곳에 각인되어 있는 아리타(有田)에 가게 되면 그 고즈넉한 도자기마을을 천천히 걸어볼 일이다. 내가 본 아리타 속의 한국과 규슈올레길 위에서 만난 일본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올해 2월에 재차 방문한 조그만 시골역인 아리타역 안내소에는 문근영이 주연을 맡았던 MBC 사극 <불의 여신 정이>(2013)의 일본판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왜일까? 아리타에서 멀지 않은 다케오(武雄)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다케오번주 고토 이에노부(後藤家信)에게 끌려온 김해의 김태도(金泰道)라는 도공이 다케오의 우치다(內田)에 가마를 열었다. 1618년 그가 죽자 부인인 백파선(百婆仙)이 다케오 가마를 운영하다가 1631년 아리타의 히에코바(稗古場)로 이주하여 덴진산(天神山)에 가마를 열고 백자를 생산했다. 그때 따라온 도공이 960명이었고 백파선이 총감독이었다. 그녀는 96세까지 장수하다가 이삼평이 죽은 이듬해인 1656년에 사망했는데, 아리타의 법은사(法恩寺)에는 지금도 이 여도공 백파선의 사리탑(法塔)이 남아있다. <불의 여신 정이>는 이 백파선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끼 낀 백파선 사리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나의 시선에는 정이보다 오히려 명성황후의 기억이 겹쳐지고 있었다.

 


박규태_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논문으로 〈현대일본종교와‘마음’(心)의 문제-‘고코로나오시’와 심리통어기법에서 마인드컨트롤까지-〉,〈고대 오사카의 백제계 신사와 사원연구〉등이 있고, 저역서로 《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