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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24호-노이질러, ‘종교하는 인간’을 묻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5. 29. 22:23

노이질러, ‘종교하는 인간’을 묻기

 

 

 

 news  letter No.524 2018/5/29    

 

 

 

 


       ‘노이질러’,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religion’을 거꾸로 읽은 것이다. ‘noigiler’, 이렇게 쓰고 보니 재밌는 구석이 있다. ‘노이즈+소리질러’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왜 굳이 거꾸로 읽기를 상상할까? 이런 시도를 해 보는 것은 종교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서다. 종교 개념의 한계는 또 뭔가? 이것은 종교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풍경 몇 가지만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종교’라고 여기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실천하는 것을 종교 ‘따위’로 표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인들이라면 선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인들이 심리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믿는다. 저마다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의 종교 이해를 참으로 여기며 종교를 판단한다. 이런 모습이 상식적 종교 이해로 종교를 이야기할 때 벌어지는 풍경이다.

       종교라는 말은 위에서 말한 몇 가지 방식으로 종교와 관련된 현상을 재단하게 만든다. 이런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종교를 거꾸로 보겠다는 발상은 이런 관점의 전환을 ‘실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물론 관점을 바꾸는데 왜 굳이 거꾸로 보려고 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오로지 이유는 하나, 그게 가장 재밌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는 방식을 전복시키고 아주 낯선 관점으로 현상을 들여다보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정말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보기는 안 좋은 점도 분명히 있다. 낯선 관점이기 때문에 소통이 어렵고, 익숙한 세계에서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분노 유발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부정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전복을 감행하는 건 만용과 치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거꾸로 보기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려면 균형감이 필요하다. ‘물음의 출발은 즐겁게, 해답의 공유는 편하게’가 좋겠다.

       우리는 종교를 갖지 않고도 종교적인 사람을 보게 된다. 최근에 구원파 오해를 받았던 박진영이 그런 사람이다. 반대로 종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도 보게 된다. 소위 ‘나이롱 신자’라는 말이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종교인일까, 아닐까? 기존의 종교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상한 사람들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면서도 복을 비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한다. 어떤 종교인들은 세상에 신은 하나라고 말하면서도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또 어떤 종교는 신을 믿지 않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수행을 통해서 모든 삼라만상을 옥죄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기원의 글을 적어 사원에 두어 사제들이 기도를 해 주면 그 기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여러 물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적 실천들이 인간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금지하기도 했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모두 사악해서 그렇다는 답에 쉽게 안주하지 않는다면, 저런 것이야 말로 자연스러운 종교적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종교인들만 이상한 걸 믿지 않는다. 길에 로또가 떨어져 있어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이 주웠을 때, 다른 사람이 제법 큰 돈을 주고 그 로또를 사겠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로또를 팔지 않았다. 결국 모두 당첨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수험생들에게 선물을 하면 휴지나 포크, 요즘은 스펀지 도끼를 주기도 한다. 다들 재미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수험생들에게 죽이나 빵을 선물하지는 않는다. 스포츠 선수들은 징크스를 믿는다. 뱃사람들은 ‘미신’에 둘러싸여 있다. 그동안 종교라는 틀로 이런 현상을 들여다보니 ‘미신’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신경 쓰며 행하지만 믿느냐 물으면 ‘아니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라고 답하게 된다.

       종교는 이런 거야라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저런 게 이상한 게 아니고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자. 되짚어보자. 종교인도 비종교인도 이상한 걸 믿고, 종교인들이 종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은 신행을 하고, 인간의 역사상 그러지 않았던 때를 찾을 수도 없다고 한다면, 아마 이런 경향은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종교의 유무와도 상관없이 사람이 사는 세상 어디에서도 불길한 걸 피하고 길한 것, 특히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그런 것을 구분해 내려고 애쓰고, 길한 것과 관련된다고 여기면 지갑도 열고 몸 고생도 마다 않는다면, 그런 특성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아마 인간이라는 점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종교인으로서 종교를 행하는, 또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어떤 종교적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규칙과 이야기, 행위 양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종교’를 볼 게 아니라 ‘인간’을 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발상의 전환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 종교문화를 들여다보는 새로운 자리는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이 끝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동안 이상했던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달라질 것이 많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지에서부터 왜 교리와 실천에 이런 괴리가 만들어지는지, 지금 우리시대 종교적 실천의 양상은 어떤지 등 무수한 새로운 물음들이 떠오른다. 가령 기독교인들의 교리 상에는 ‘유일신’을 믿는다고 하는데, 실제 기독교인들이 유일신을 믿는지를 물을 수 있다. 이름은 하나이지만 실제 신행의 현장에서 마음속에 떠올려지는 신의 모습은 그때그때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바라는 게 있어서 기도할 때, 기도를 들어 주리라 여기는 신은 자애롭고 친밀한 신이지, 심판을 내리고 벌을 주는 공의의 신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만나고 있는 신의 모습도 지역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고 인간 세상에는 결코 ‘유일한’ 신이 깃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인데, 하나가 자연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고 보면 의미가 색달라 질 수 있다.

       하나의 소음처럼 던져진 물음이 많은 사람들의 함성이 된다면, 종교 그리고 ‘종교하는’ 인간을 다르고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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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이질러’는 최근에 구형찬 박사, 이종우 박사와 함께 시작한 팟캐스트 프로그램(쇼! 개불릭)의 새 시리즈 이름이기도 하다.

 


심형준_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강릉단오제 主神 교체 문제에 관한 고찰〉, 〈아편(마약)과 종교: 아편의 비유, 그 이면을 찾아서〉, 〈‘신화적 역사’와 ‘역사적 신화’〉, 〈〈스켑틱〉이 종교학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한국 기독교민속신앙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밀양 송전탑 사건을 둘러싼 정당성 담론의 전개〉 등의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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