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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의 전통종교들을 전통문화로서만 이해해야 하는가

 

               

   news  letter No.531 2018/7/17                  

 

 

 

 

 



       몽골고원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흉노를 비롯해서 돌궐, 유연, 선비, 거란, 몽골, 여진 등의 수많은 유목민들이 삶의 자취를 남긴 사막과 초원 그리고 삼림 지대를 지칭한다. 본래 시베리아 샤마니즘의 본고장인 이곳은 유라시아 초원지대 심장부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찍부터 다양한 종교들이 유입되었다. 몽골제국이 형성된 13세기경에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 수피즘교단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 불교, 가톨릭 등 세계 여러 종교들이 공존했다. 이곳 유목민들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서는 물론이고 척박한 삶의 환경에서 체득된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인 태도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더구나 오아시스의 농경민들로부터 부족한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동서교역을 장려했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타자의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특히, 몽골제국의 창건자 칭기스칸은 종교 문제가 국가의 내적인 평화를 해칠 수 있고, 또 이민족을 정복하고 통치하는 데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이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한 모든 종교에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세금도 면해주었으며, 또 이를 법제화해서 후손들에게 영구히 지키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 자신은 전통적인 텡그리 신앙인 몽골 샤머니즘을 고수했다. 하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 완전한 자유를 허용했다. 13세기 초에 벌써 타자의 신앙을 존중하는 현대판 다종교사회를 구현한 셈이다. 13세기에 몽골을 방문한 수도사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에 의하면 황실과 조정의 도움으로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살고 있었고, 많은 몽골 왕공과 부인들이 기독교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몽골고원의 종교사는 샤머니즘이 지배한 북방 유목민족 시대, 샤머니즘과 라마불교가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다종교사회를 이룬 몽골제국 시대(1206년~1360년), 샤머니즘이 쇠퇴하고 라마불교가 지배한 북원(北元)과 명(明)의 대결시대, 라마불교의 전성기인 청(淸) 복속 시대(1368년~1911년), 종교박멸의 사회주의가 지배한 몽골 독립 이후(1920년 이후), 칭기스칸과 라마불교로 새로운 몽골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민주주의 시대(1990년 이후)로 이어진다. 몽골의 현재 종교는 전통적인 샤머니즘과 13세기에 도입된 라마불교가 서로 융합함으로써 교조적 사회주의를 극복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전통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민간신앙, 인류애를 기반으로 하는 고전종교, 종교를 추방하려는 근대 세속주의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빚어낸 최근세 종교변동의 범형이 될 만한 사례다.

       샤머니즘은 오래전부터 북방 유목민에게 널리 퍼져 있던 전통적인 종교다. 하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유목민들과 그들의 국가대사에 대해 점치고 행운을 비는 그리고 하늘의 뜻을 대신해 자문하는 종교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는 종교다. 칭기스칸도 대샤만 커커츄(Kokochu)로부터 대지의 지배자로 신탁을 받았으며, 궁정에는 샤만의 성격을 가진 베키(Beki)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13세기에 이르러 몽골제국이 성립되자 샤머니즘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다민족을 수용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마승려들과 공시(共施)관계(전륜성왕과 달라이라마를 서로 시주함)를 가진 몽골 왕공(王公)들은 샤머니즘을 탄압하고 라마불교를 몽골에 정착시키려했다. 이에 샤머니즘 단체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말부터 샤머니즘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당시 샤머니즘의 많은 부분들은 라마불교에 흡수 통합되어 오늘날 대중성과 전통성을 가진 몽골의 라마불교를 만들어 냈다.

       몽골의 라마불교는 몽골의 광활한 초원과 예측할 수 없는 자연 환경에서 유목생활을 해야 하는 그들의 의식에 깊이 자리할 수밖에 없는 토착신앙과 샤머니즘을 기층으로 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 칸에 이르러 라마불교는 마침내 원나라의 정신 통일을 추구하는 종교로서 국가적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1247년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불교 샤카파의 파스파를 모셔와 국사(國師)로 삼았다. 그러나 라마불교가 실제로 몽골 땅에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가 망하고 서몽골 오이라트 군주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16세기 말 북원시대였다. 이후 티베트불교의 겔룩파는 몽골사 전개 과정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몽골에서 라마불교를 상징하는 자니바자르가 보그드(Bogd)에 오르면서 라마불교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1911년 외몽골이 청나라로부터 독립했을 때 외몽골의 라마교 수장 제8대 젭춘담바는 신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될 정도로 라마불교는 정교(政敎)양면에서 몽골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몽골 전 지역(중국의 내몽골 자치구, 외몽골, 부리야트 공화국, 칼묵 공화국)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라마불교는 다른 전통 신앙과 같이 불법화되고 이단으로 취급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불교는 마약이며 승려는 혁명의 적이라고 선포되었다. 라마불교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행해진 것이다. 샤머니즘도 이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1921년 이후 라마불교에 대한 갖가지 탄압이 있었는데 1937~1939년에 인적 청산과 함께 모든 사원들이 폐쇄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3년 동안 20,300여 명의 승려가 체포, 구금 또는 처형되고 20세기 초에 750여 개에 달하던 사원은 단 한 곳도 온전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아야 했다.

       1989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전통문화 복원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시절에 억압되었던 전통 종교와 신앙이 제자리를 찾고 있다. 샤머니즘도 전통문화의 하나로 되살아나고 샤먼들의 활동도 재개되었다. 이 시기 몽골 라마불교의 부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은 관세음보살상의 복원 불사이다. 이 불사는 민족주의 부흥의 상징물로 여겨져 거국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불상을 재건(1990~1996)하는데 전 국민이 시주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몽고인의 삶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샤머니즘과 라마교인 것 같다. 특히, 샤머니즘은 16세기에 법률제정까지 해 시행한 라마불교의 탄압, 20세기 종교박멸을 주장한 세속주의 탄압물결 속에서도 당당히 자신을 지켜왔다. 현재 외몽골에서 샤먼 신앙의 주요 분포지역은 서북부의 홉스골 호수 부근과 동부의 도르노드 아이막이다. 현재도 몽고인들은 중소도시를 내려다보는 언덕바지에 도시중심의 사찰을 계속 짓고 있고, 사찰이 아니더라도 기회만 있으면 오보(oboo)를 찾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또 일정 성소를 여행하게 되면 가족의 안녕을 빌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가족이 모여 돌탑을 쌓는 행사를 벌인다. 몽골 전통종교들은 지금은 전통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의미가 더 크겠지만 앞으로 세속국가인 몽골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자못 궁금해진다.

      

 


윤승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논문으로 〈한국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반응형태 연구〉,〈근대 종교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방안〉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공저),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공저),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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