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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35호-무더운 여름날 옛 고사를 떠올리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8. 14. 19:55
                                       무더운 여름날 옛 고사를 떠올리다

 

                 news  letter No.535 2018/8/14    

 

 

 

 

 



       중국 고대 문헌에 성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이야기들을 보면 이질적인 에피소드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 반드시 유일한 것은 아니겠지만 예컨대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와 같은 요인들은 원래 전승되던 이야기에 새로운 에피소드를 첨가하여 주제와 분위기를 예전과 완전히 다른 쪽으로 전개시킨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변형된 이야기가 그 이전 시대로 소급되어 원래부터 그러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화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관점의 차이나 이질적인 결들을 찾아내서 왜 이와 같은 층위가 생겼는지 규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무너뜨리고 상나라를 세우자마자 나라에 가뭄이 든다. 자그마치 7년 동안 이어진 가뭄으로 온 산하가 말라죽어가는 고초를 겪는다. 영험한 곳을 돌아다니며 기도를 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탕왕은 가뭄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정치에 잘못이 있어서인지, 백성들의 삶이 온전하지 못해서인지, 나라에 뇌물이 성행하고 중상모략이 심해서인지 하늘은 왜 이런 끔직한 고통을 내리는가. 점을 치니 사람을 제물로 바치란 점괘가 나왔다. 탕왕은 스스로 희생이 되기로 결심하고 상림(桑林)의 제단에 올라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으니 백성들만은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그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사라 알란(Sarah Allan)은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 층위를 발견한다. 하나는 상나라와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는 주나라에서 기인한 것이다. 상나라에서 인간희생제의가 흔하게 행해지던 의례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갑골문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또한 비를 구하기 위하여 인간을 희생으로 바친 사례도 갑골문을 통해서 확인된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는 상나라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이 이야기는 왕을 도덕적인 책임을 지닌 존재로 묘사한다. 사라 알란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행위를 도덕적인 잣대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는 관념은 주나라 때 비로소 생긴 것이다. 이에 비하여 상나라 왕과 신은 의례적인 교환 관계로 얽혀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늘의 재앙이 발생한 원인이나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도 모두 신과 인간 사이에 행해지는 의례의 적합성 여부에 달려 있다. 주나라 천명 개념의 등장은 이와 같은 기존의 신인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였다.

       사라 알란은 도덕적인 존재로서 천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를 구축한 것으로 묘사되는 탕왕이 하늘의 재앙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록 탕왕은 덕으로 충만한 존재이지만 이전 왕조의 통치자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오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도덕적인 존재가 저지른 국왕살해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7년의 가뭄은 탕왕이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그와 같은 도덕적 허물에 대하여 하늘이 내린 재앙이며, 탕왕은 그러한 책임을 혼자서 짊어지고자 한다. 그 순간 그를 괴롭혔던 속박이 모두 풀린다. 비가 내린 것이다.

       이 이야기는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천명 개념의 맥락 속에서 상나라 때부터 전승되고 있었던 어떤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상나라의 전승이 주나라의 맥락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산해경》, 《회남자》, 《초사》 등의 문헌을 보면 열 개의 태양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동해 밖 양곡에 위치한 부상(扶桑) 나무 가지에는 열개의 태양이 머무르면서 매일 아침 하늘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매일 차례대로 하늘의 운행을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다음에 있을 여행을 또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불분명한 이유로 이러한 규칙이 깨진다. 열 개의 태양이 동시에 하늘로 떠오른다. 온 세상이 녹아내리는 고통이 수반된다. 천제는 예(羿)라는 궁사를 내려 보낸다. 예는 아홉 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땅으로 떨어뜨리고 한 개의 태양만 남겨놓으며 재앙을 종식시킨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이야기에는 탕왕의 고사처럼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광직(張光直)과 사라 알란은 갑골문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상나라 사람들이 열 개의 태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상나라의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전개되는 에피소드는 열 개의 태양을 제거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열 개의 태양이 급작스럽게 재앙의 원천으로 취급되는 대목에서 기존 상나라의 우주관과 전혀 다른 관점이 개입되고 있음이 감지된다. 어떤 요인이 이와 같은 단절의 지층을 형성한 것일까. 누군가 모든 이야기는 인식의 도구이자 이데올로기의 수로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면서 글을 맺는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중국 고대 巫敎 인식에 관한 연구: 商代 巫의 사회적 위상을 중심으로〉, 〈상나라 수렵, 목축, 제사를 통해서 본 삶의 세계 구축과 신, 인간, 동물의 관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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