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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43호-하느님의 올바름을 묻는 요즘 영화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10. 9. 16:10

 

                                하느님의 올바름을 묻는 요즘 영화들

 

 news  letter No.543 2018/10/9                  

 

 

 

 

 
  
  

  세상이 이 모양인데 하느님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가? 서구 유일신 전통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들을 겪을 때마다 세계관에 대한 회의가 하느님의 존재를 묻는 형식으로 솟아올랐다. 이에 대한 신학적 대답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부른다. 오래된 물음과 답변이지만, 문제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강렬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서양에서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이 물음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었고,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이 문제를 더 진중하게 끌어안고 있다.

 

필자는 직업적 필요 때문에 종교와 관련된 영화가 나올 때마다 꾸역꾸역 보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본 영화들에서 신정론의 문제는 꾸준히 그리고 더 신랄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 인상적인 영화 몇 편을 언급하고자 한다.

  신정론을 다룬 대표적인 한국 영화는 <밀양>(2007)이다. 올해 초 안태근 씨의 회개 간증에 분노를 느낀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를 계기로 한국사회에 재소환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신애(전도연)는 아들 준이를 잃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다면, 왜 우리 준이를 그렇게 내버려 두셨나요?" 전능한 신의 존재, 신의 선함, 고통스러운 현실의 존재라는 신정론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질문이다. 신애는 교회를 다니며 위안을 얻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자신과 상관없이 하느님에게 회개하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살인자를 면회한 후에 그 위안이 깨진다. 꺾인 들꽃처럼 신애가 쓰러지는 순간에 기독교 세계관과 신정론은 붕괴한다. 그 결과는 원작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자살이고, 영화에서는 이웃공동체와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삶이다.


  <오두막>(2017)의 앞부분은 <밀양>의 미국판이라고 할만하다. 한 아버지의 어린 딸이 휴양지에서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아버지는 “왜?”라는 질문을 품에 안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밀양>과는 달리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이 문제를 봉합하려는 최대한의 노력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현실 인물로 형상화된 성자, 성부, 성령이 등장해 주인공의 아픔을 보듬어준다. 흥미롭게도 성부(聖父)를 표상하는 인물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주머니이다. 주인공이 “가장 절박한 순간에 그 아이를 버리셨어요.”라고 원망하자, 성부 아주머니는 “아니야, 자네는 불가사의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네.”라고 운을 뗀 뒤, 끝내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아이가 고통을 당하는 그 순간에 “우린 그때 함께 있었어.”라고 힘겹게 말한다. 이 대화에는 여러 유형의 신정론이 녹아 있지만, 두드러지는 것은 신의 전능함이라는 주제가 약화하고 신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공감의 주제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예기치 못한 맥락에서 만나는 신정론도 있다. <루르드>(2011)는 성지에서 일어난 기적을 다룬 영화이다. 성지순례단을 이끄는 수녀는 기적을 갈구하는 신자들과는 달리 냉정한 신학을 가진 이이다. 신체적 고난 속에서 기적을 바라는 이들에게 수녀가 늘 하는 말은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당신이 겪는 고통엔 깊은 뜻이 있어요.”이다. 나아가 “난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라는 바울의 말도 인용한다. 논리정연한 신정론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뿐더러 폭력으로 받아들여 질 법한 말이다. 기존 신정론의 쓸모없음을 꼬집고 있는 장면이다.

   상황이 극단적일수록 신정론의 울타리는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아뉴스데이>(2016)는 2차대전 때 러시아 군인에 점령되어 집단 강간을 당한 폴란드 수녀원의 이야기이다. 많은 수녀가 임신하였고, 수녀원에서는 폐쇄를 막기 위해 몰래 의사를 불러 출산을 하고 심지어는 아이를 몰래 갖다버리기도 한다. 의사가 수녀에게 묻는다. “믿음을 잃은 자는 없었나요?” 수녀가 답한다. “믿음이라는 게 말이죠, 처음엔 아버지 손을 잡은 어린아이처럼 안정을 느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의 손을 놓치는 순간이 분명히 와요. 우리는 길을 잃었어요.” 수녀의 대답은 “그것이 우리가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라는 신앙의 언어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아버지의 손을 놓쳤다는 말에 진심이 실려있는 것 같다. 전통적인 종교적 설명은 여기서도 멈칫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내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시리어스맨>(2010)에 나오는 랍비의 농담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현대판 욥이라고 할만한 인물로,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온갖 불행을 맞아들이게 된다. 그는 불행의 의미를 알기 위해 필사적으로 한 랍비를 찾아다녔고 우여곡절 끝에 겨우 상담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랍비는 대답 대신 한 치과의사 이야기를 해준다. 환자의 치아에 히브리어로 ‘도와주세요’라고 새겨진 것을 발견한 의사가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원래 생활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랍비는 말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답을 줘야 하는 건 아니네." 하느님이 인간에 빚진 것은 없으며, 다만 인간이 궁금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우리들의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바람을 신의 속성에 투영하면서 물음과 해답이 꼬이게 된 것 아닌가? 묻는 이를 복장 터지게 하는 랍비의 심드렁함은 인간과 다른 차원에 신의 섭리가 존재함을 말하는 욥기의 태도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존 종교에 대한 불신이 높아가는 시대이기에 신정론이라는 오래된 문제의식이 다시 떠오르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영화에서 나타난 다양한 반응들은 전통의 울타리의 가장자리와 그 너머를 배회한다. 기존 종교에 대한 현대인의 시선이 영화에 정직하게 담긴 결과일 것이다. 

      

 


방원일_
서울대학교 강사
논문으로 <혼합현상에 관한 이론적 고찰>, <원시유일신 이론의 전개와 영향>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자연 상징》, 《자리 잡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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