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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天池)의 신성성의 기원에 관한 단상

 

 

news  letter No.544 2018/10/16      




        “천제(天帝)의 대궐이요 천화(天化)의 근원이매, 천(天)이라 함은 진실로 마땅하거니와 물이 괸곳이라 해서 그만 지(池)라고

        해버림은 너무 간차롭게 손쉽게 지어 던진 이름이 아닐까? 보아라! 다시보면 그것이 대수롭지 않고 예사롭게 물을 담고 있는

        하나의 못동이가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중략) 조선의 마음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조선의 운명이 무엇으로써 그 구심점 추기(樞機)를 삼는지를 조금이라도 살피고 생각한 이로야, 천지를 한 늪으로 아는 이가

       반쪽인들 있을 것이냐? 안될말이지. 못될말이지”

  이 글은 1926년 7월 24일 경성을 출발하여 7월 29일부터 8월 7일까지 도보로 백두산을 근참(覲參)했던 육당 최남선이 백두산의 정상 천지에 이르러 마치 천지개벽신화를 실제로 보는 듯한 감격으로 읊은 것이다. 그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가 펼쳐졌다고 여기는 곳, 또 동명신화의 무대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신성한 공간을 여행하는 순례자와 같다. 전통적 신화를 구체적인 장소에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임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마치 그가 백두산 천지를 민족의 성지(聖地)로 거듭나는 의식을 치루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보다 앞서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이가 있었다. 홍암 나철은 1909년 경성 제동 취운정 아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단군교를 열었다. 1910년 홍암은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고, 1911년 백두산을 순례하고 이곳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백두산을 천조산(天助山), 천산(天山), 삼신산(三神山)이라 칭하며 천신시조인 단군이 이 산에서 내려왔고 천신자손도 이 산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유사》에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정상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 이르고...”라고 하면서 일연(一然)은 “태백은 오늘날의 묘향산이다(卽太伯 今妙香山)”라고 주석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주장하며 태백을 오늘날의 백두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태백 뿐 아니라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도태산(徒太山), 장백산을 모두 백두산의 다른 명칭이라고 하였다. 천지란 이름 또한 고지도에서는 대지(大池), 대택(大澤), 달문담(達門潭) 그리고 하늘과 가깝다는 뜻의 천상근(天上近)으로 표기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단군이 하강한 태백산이 백두산이라는 관념은 한말에 등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극적인 변화를 겪었던 시대상황을 고려해보면 이 시기에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신성한 공간과 극적인 장면의 연출은 우리 민족의 존립의 근거로서 절박했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빚어내는 틀속에서 공식적으로 부활하기도 하였고 또 국가나 신분적 틀에서 벗어나 민족의 구심점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백두와 천지, 하늘 그리고 민족이 연결되면서 백두산은 민족의 성산(聖山) 혹은 영산(靈山)으로 구심점의 추기(樞機)가 되지 않았을까

   “천지(天池)에 담긴 것이 물이 아니라 하늘이어서 천지라고 일컬었음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는 한 우리의 구원론은 아직 살았음에 틀림 없다.......하늘은 있다!” 
       (정진홍, 《하늘과 순수와 상상》, 34쪽)

      

 


하정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1920-30년대 한국사회의 '신화'개념의 형성과 전개> , <근대 단군 담론에서 신화 개념의 형성과 파생문제>,〈신화와 신이, 그리고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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