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890호-러셀 독서노트: 수학과 행복 그리고 종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5. 7. 8. 17:23

러셀 독서노트: 수학과 행복 그리고 종교

 

news letter No.890 2025/7/8

 

 

 

 

 

갈수록 옛날 생각에 젖어드는 걸 보니 나이 먹어 간다는 것이 실감난다. 재수할 때 영어공부차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행복의 정복1)을 읽었던 적이 있다. 당시 막연하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행복이란게 과연 정복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행복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요즘 그의 책 몇 권을 읽으면서 새삼 러셀이라는 인간의 다면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종래 내게 러셀 하면 그저 현대 분석철학을 선도한 철학자이자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수학원리라는 명저를 펴낸 수학자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특이한 교육이념으로 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던 교육자였으며, 더 나아가 전쟁이라든가 핵문제 등을 둘러싼 첨예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적 신념을 실천했던 걸출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물론 결혼을 네 번이나 했던(마지막 결혼은 80) 정력가였다는 점도 그의 다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요인이다. 그런데 이성으로도 경험으로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는 합리적 회의주의자를 자처했던 러셀은 의외로 누구보다 삶과 세계의 권태로움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환갑의 나이에 쓴 어느 일기에서 자신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의 생을 돌아보면 불가능한 이상들에 매달린 무용한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세계는 암흑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다나는 습관의 힘에 밀려 계속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 일상의 일과 즐거움 밑에 깔린 절망을 잊는다. 그러나 하릴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면 내 인생에는 목적이 없었으며 남은 여생을 바칠 새로운 목적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숨길 수가 없다.”

 

청소년기의 러셀이 늘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자서전2)의 대목들을 읽던 중, 문득 나는 젊은 날의 언젠가 쇼펜하우어를 읽다가 다음 구절에 무조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을 떠올려냈다. “삶이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와 같다. 인간은 행복할 때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불행해져야 그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내게 현재의 행복이란 없고, 행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염세주의의 모토는 구약성서 전도서에도 나오는 말이다. 러셀 또한 행복의 정복에서 나는 살아있는 자보다 오래전에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태어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해지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전도서 4:2-3)는 히브리적 염세주의를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런 러셀로 하여금 98세까지 장수하면서 열정적인 다면체의 삶을 살게 해 준 동인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수학이야말로 그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러셀은 열한 살 때 처음 배운 유클리드 기하학과의 만남을 내 인생의 큰 사건 중에 하나였고 마치 첫사랑처럼 매혹적이었으며 향후 수학은 그의 주요 관심사이자 행복의 주된 원천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서전은 그가 15살 때 혼자 일몰을 바라보며 자살을 생각하곤 했는데 수학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에 자살을 감행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혹은 인간 세상에서 아무런 위안도 받을 수 없을 때 수학과 별들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말년의 러셀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기회가 또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볼 것이라고 강하게 삶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긍정의 긍()자는 즐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희랍인 조르바처럼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곧 삶을 즐긴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보다도 타자의 고통에 민감했던 러셀은 동시에 누구보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즐길 줄 모른다면 군자라 하기 어렵다(非樂不足以語君子).”고 말한 정자를 따르자면 러셀은 군자라 칭해질 만하다.

 

흥미롭게도 러셀은 스테디셀러 서양철학사3)에서 다음과 같이 부처와 니체의 가상 대화를 적고 있다: 부처의 세상을 무미건조하고 활력도 없는세계라고 비난하는 니체가 우리 모두 권태로 죽지 않을까 두렵다.”고 하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고통을 사랑하고 삶에 대한 사랑을 부끄럽게 여기는 그대는 그럴테지요. 그러나 누구라도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는 행복할 수 없을 테지만, 정말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해질 겁니다.” 여기서 부처가 러셀을 대변함은 말할 나위 없다.

 

러셀은 현대세계에서 행복이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그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사정이 허락하는 한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거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이를 위해 단순성의 회복이라든가 인간과 사물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러셀의 행복론은 단지 평범한 대중적 처세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컨대 그는 서양철학사에서 기존의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외에 제3의 범주로서 감정철학이란 것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감정철학은 바로 행복에 대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철학을 가리킨다.

 

다소간의 종교적인 신조나 신에 대한 믿음 없이 행복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러셀은 종교가 행복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종교를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준 근원이라고 보기까지 한다. 종교는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윤리 규약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종교(특히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과학의 힘에 경도된 무신론자였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4)

 

그러나 만일 영원한 별의 침묵 속에서 삶을 견디게 해 주고 살아갈 힘을 주는 모종의 진실 또는 진리가 바로 종교라는 광의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러셀에게도 종교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이를테면 그에게 행복감을 주었던 수학 같은 거 말이다. 수학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적 명상을 수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들은 영원불멸과 윤회를 믿는 금욕적인 채식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시민 불복종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회운동가이자 시인인 소로(H. D. Thoreau)에 의하면, 진실에 관한 가장 확연하고 아름다운 서술은 결국 수학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인성 수양뿐만 아니라 숨겨진 원리를 탐구하고 깊은 의미를 찾아내어 지혜를 증대시킬 수 있으니, 이러한 수학의 효능이 음악이나 독서와 어찌 다르겠는가(探賾鉤深 足以益智 此其功豈異於琴瑟簡編哉, 湛軒書)”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만년의 러셀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수학 또한 순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싶다. 한편으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존재와 부재를 넘나드는 기이한 숫자 영(제로)은 수학을 미지의 세계와 이어지게 만든 신의 숫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러셀을 키워준 것은 교조적 엄격주의자 친할머니였다. 그녀는 형이상학에 관심이 있는 손자에게 경계의 뜻으로 다음과 같은 격언을 15,6차례나 들려주었다고 한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아무려면 어때. 물질이란 무엇인가? 신경쓰지마(What is mind? No matter; What is matter? Never mind).” 수학도 행복도 종교도 설마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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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09(2).

2) 버트런드 러셀, 인생은 뜨겁게: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 송은경 옮김, 2014.

3) 버트런드 러셀, 러셀 서양철학사,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2019(전면개정판).

4) 버트런드 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5(개정판).

 

 

 

 

 

 

박규태_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저서로 《한과 모노노아와레: 한일 미의식 산책》,《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