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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폭력’을 안고 산다는 것


2010.11.16

*이글은 <종교문화비평>18호(9월30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와 준 덕분에(?) 다시금 소슬한 평화의 뜨락을 기억해 내고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옹성거리는 요즈음이다. 폭서에 유난히 시달렸던 지난 여름, 저 자연의 폭력이 결국 인간의 폭력 때문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으로 인해 더욱 불안해했던 이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령 18호의 특집 주제를 서슴없이 ‘종교·폭력·평화’로 잡아 보았다.


하지만 이 얼마나 다의적인 주제인가. 종교는 한편으로 평화와 비폭력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과 억압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이해를 굳이 전제로 삼지 않더라도, 종교와 폭력과 평화는 실로 무수한 스펙트럼의 양의성을 함축하는 주제군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선은 종교의 기원으로서의 폭력이라는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한 폭력, 종교 내적 차별구조,종교 테러, 종교 내셔널리즘, 국가권력에 의한 종교탄압, 종교간 분쟁, 종교전쟁, 내셔널리즘 및 권력 자체의 종교성 문제 등등, 인간사회와 개개 삶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번 특집의 필자들은 대체로 실천적인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주제의 다의성과 양의성을 최소화시키고 있다. 이와 동시에 필자들은 폭력과 평화가 종교의 양날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싶다. 먼저 이 주제에 관한 이론적, 인식론적 문제를 요한 갈퉁의 개념들을 끌어들이면서 큰 틀에서 다루고 있는 김명희의 글 〈현대평화연구에서 종교의 위치〉는 폭력과 평화의 개념을 세분화하여 규정하면서 이른바 ‘적극적 평화’(구조적 폭력 및 문화적 폭력이 없는 상태)야말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 목표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그러면서 ‘딱딱한 종교’(초월적이고 이분법적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와 ‘부드러운 종교’(내재적이고 일원론적인 힌두교, 불교, 퀘이커교 등) 가운데 특히 후자의 가능성에 대해 따뜻한 신뢰와 기대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이 ‘부드러운 종교’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류경희의 글 〈인도 종교문화의 비폭력 평화정신과 종교폭력〉은 그와 같은 신뢰와 기대가 항상 낙관적인 결과를 낳지만은 않는다는 현실 앞에서 치열한 고민을 한 흔적들로 얼룩져 있다. 천(千)의 이름을 가진 온갖 폭력들이 내면화되어 도처에 편재하는 곳에서 아힘사의 비폭력 평화정신은 그저 허구적인 이상에 불과한 것일까? 결국 필자는 그것이 “제한적인 상황과 범위 안에서 실천되고 작동해 왔다”고 정리하면서 평화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종교’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 류제동의 〈불교에서의 폭력과 평화〉는 아예 “삶 자체가 폭력에 기반하여 존재할 수 있”다는, 곧 “살아 있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면서 불교 역시 호국불교의 전통을 비롯하여 윤회관이나 열반론 등에 있어 폭력의 정당화 기제로 작용해 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근원적인 이해에 입각하여 필자는 징병제, 병영문화, 군승제도, 양심적 병역거부, 군비축소, 사형제도의 문제 등 현대의 시사적인 이슈들에 대한 불교적 해법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특집의 나머지 두 글은 이른바 ‘딱딱한 종교’의 경우를 문제삼고 있다. 먼저 박영대의 〈평화에 관한 가톨릭 사회적 가르침과 평화운동〉은 특히 전쟁, 군비축소, 테러리즘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교황청의 공식입장이라 할 수 있는 〈간추린 사회교리〉(2004)에 정리된 가톨릭의 평화 교리를 세부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교리적 차원과 연동시켜 2천년대 한국천주교회에서의 이 라크전쟁 반대운동, 양심적 병역거부운동, 제주교구 평화의 섬 운동 등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 의의와 문제점을 짚고 있다. 끝으로 김형민의 글 〈그리스도교의 폭력과 유일신 신앙〉은 아스만의 ‘모세구별’이라는 개념을 실마리 삼아 ‘딱딱한 종교’에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여지는 배타적 폭력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필자는 성서비평적 맥락에서 아스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교가 “폭력에 취약한 종교”라는 평가에 대해 자기성찰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리스도교 내부로부터의 인식 변화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집 글들은 하나 같이 어떤 종교가 어떤 평화사상을 제시하고 있느냐 보다는, 그 평화사상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평화 실현에 얼마만큼 기여하고 있으며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 요인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제요인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분석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강인철의 글 〈해방후 한국 종교-정치 상황의 특성과 변동〉은 직접 폭력의 문제를 다룬 글은 아니지만, 종교와 폭력이 어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제 안에서 접속되고 재구성되는지 그 다양한 방식의 일단면을 시사해 준다는 점에서 특집 주제를 보완해 주는 측면이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상당히 치밀한 이념형적 전략분석에 치중하고 있는 이 글의 본령은, 부제가 말해주듯이 해방 후 한국의 종교와 정치의 역동적인 관계 양상이 보여주는 구조적인 특성들을 체계적으로 추출함으로써 그 중장기적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거시적인 분석틀의 구성에 있다. 후속 글이 기대되는 야심찬 시도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에 비해 방원일의 글 〈하멜 보고서의 한국 종교 서술에 대한 고찰〉은 보다 미시적인 글쓰기 전략에 입각해 있다. 《하멜 표류기》를 둘러싼 기존의 이해 즉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식의 서술과 관련하여 필자는 하멜의 원본에 가까운 회팅크판의 분석을 통해 ‘발견적’인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한국종교 연구에 신선한 자극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장로교회의 사례를 통해 이른바 ‘열린 예배’의 수용양상과 그 제의론적 의미를 규명한 원지의 글 〈새로운 예배문화 만들기〉 또한 현장성에 밀착하는 인터뷰 방법론과 이론적 천착을 매끄럽게 접합시킨 인문학적 글쓰기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글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줄 성싶다. 한편 류성민의 〈중국 종교의 현재와 미래〉는 우리에게 아직 익숙치 않은 현대 중국종교의 현황을 사회적 변화와 연동시키면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신정보’의 보고라 할 만한 글이다. 특히 전망적 차원에서 “중국 종교의 미래변화는 중국의 체제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시금석”이라고 진단하는 장면은 종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현실적으로 왜 필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박종천의 두 번째 〈이미지 기행〉으로 〈화폭에 담은 자연, 자연에 새긴 종교적 이념〉이 나간다. 자연과 문화의 쌍방향성에 주목하면서 ‘종교와 이미지’를 그통로로 삼아 태극과 하도낙서로부터 조선시대 회화와 병풍화 및 석각과 병산서원 만대루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유교문화의구석구석을 만지고 뒤집고 펼쳐내는 필자의 멋들어진 솜씨가 심상치 않다.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의 분석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상상의 힘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여행의 매력이 거기에 숨겨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미지의 여로와 맞닿은 〈설림〉의 숲길에서 우리는 ‘로부터의’ 자유와 ‘에로의’ 자유를 향한 가지뻗기를 멈추지 않는 수목들에게 ‘입맞춤’하는 여행자의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나만의 착각일까? 이연승의 글 〈Just A Kiss〉는 로맨스와 영화와 이슬람과 테러 등의 단어들이 기묘한 배합으로 반죽되고 발효하여 유교라는 빵을 만들어낸 듯한 느낌을 준다. 지난 여름 수많은 안방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화두를 빌어 말하자면, 유교는 지금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배주른 빵’도 ‘가장 재미있는 빵’도 아니지만 여전히 ‘가장 행복한 빵’이 될 만한 효소를 내장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이쯤 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겠다. 참으로 내 안의 폭력을 응시 하는 자는 누구인가. 내 안에 평화가 없다고 느끼는 이가 아닐까? 역설적일지언정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평화가 없다 해서 평화의 길을 찾아가려는 시도 자체를 성급하게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안의 폭력’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만 한다면 ‘내 안의 평화’ 또한 지우지지 않을 하나의 운명일 테니까.


박규태_

편집위원장. 한양대 교수


chat0113@paran.com

주요저서로 <<종교읽기의 자유>>(공저),<<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히메까지>>,<<일본정신의 풍경>>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3>>,<<신도,일본태생의 종교시스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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