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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홍의 살며생각하며](9)너 아니?

 

한국대학신문 [기획연재] 2014.04.27

 

***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들 한다. 나날이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들 한다. 우리 시대 종교학 석학이 보내는 '소소해서 종종 잊곤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메세지 <정진홍의 살며 생각하며>에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나보자.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느 장면에서 문장은 정확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의 글이 있었던 것이 아직도 잊히질 않습니다. “너는 아니? 종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길 가의 몇 번째 전봇대에 붙어 있는 조그만 양철 광고판 한 귀퉁이가 찍으러진 것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문장을 제 마음대로 만들어 쓰고 나니 작가에게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인용을 하려면 다시 작품을 읽고 정확하게 문장을 찾아 옮겨야지 이렇게 무책임한 짓을 할 수 있느냐”는 꾸중이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설을 읽고 지니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어 내게 각인된 어떤 이미지이지 않느냐고 항변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더구나 반세기 전에 읽은 것인걸요. 그러니 제게 중요한 것은 이런 고증(考證)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그런 구절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을 읽은 다음에 이를테면 ‘종로, 그 화려한 거리’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기는 이러한 경험은 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명승지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안내판을 읽으면 갑자기 건물도 글씨도 경관도 새로워집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거지요. 오백년 전의 숨결이 느껴지고 그 때의 촉감이 살아납니다. 삶의 지평은 그런 경험들을 첩 쌓으면서 두터워지고 넓어집니다. 게다가 그런 느낌이 절실해지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제법 ‘큰 사람’이 된 것 같은 설렘조차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몇 번째 전봇대의 찌그러진 작은 광고판’은 이런 경우와 사뭇 다릅니다.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명승지의 안내판이 ‘위대한 것’에 대해 눈뜨게 한 일컬어 ‘비일상의 세계’에 대한 계시라고 한다면 찌그러진 간판, 그것도 몇 번째 전봇대에 붙어 있는 그런 것은 ‘사소한 것’에 대해 눈뜨게 한 일컬어 ‘일상성의 세계’에 대한 계시라고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 또는 이런 추억을 통해 무언지 굉장한 도덕적 규범이나 깊은 성찰의 주제를 찾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커다란 것’에 대한 관심은 제법 기울일 줄 알면서도 ‘작은 것’에 대한 관심은 덤덤하다 못해 아예 차단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이지 않은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오랜 만에 찾아온 친구를 만나 “친구 좋다는 게 무언데...”하면 “그럼, 그렇고말고!” 하는 일상 속에서 정의가 얼마나 허무하게 유실되는지를 잊습니다.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작은 것에 대한 무감각은 일상의 소멸이 아니라 커다란 것에 대한 기대를 해체해버리는 것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자기도 우리도 세상도 속이는데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작은 일상의 간과는 삶의 파국을 초래하는 근원적인 인(因)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 전에 몇몇 친구들이 함께 한 자리에 시인도 한 사람 있었습니다. 제각기 자기 삶의 어려움을 이런저런 투로 풀어놓는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지치고 외로우니까요. 그런데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가장 괴로운 것은 시가 써지지 않는 게 아니야. 시제(詩題)가 떠오르지 않는 거야!’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했습니다. ‘뭐 그게 그리 어려우냐? 나는 가끔 길을 가면서 간판들을 눈여겨 읽곤 하는데 그것을 죽 이으면 그게 삶이더라. 그게 내 마음대로 말한다면 내게 시거든?’ 시인은 말이 없었습니다만 저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거야!’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길거리를 걸으면서 간판을 읽어 보았습니다. 상호를 넣어야 실감이 납니다만 그저 나열하면 분식집-옷수선집-커피전문점-귀금속-호두과자-인테리어-치과-미용실-은행-어린이집-복덕방-우체국-핸드폰-피부관리-안경점-화원-건강식품 등등 그 이어짐이 그대로 시로 읊어졌습니다. 이제까지는 그저 사느라 힘든 마디들로 읽혔는데요.

시인에게 달려가 말하고 싶었습니다. ‘너 아니? 몇 번째 전봇대의 작은 광고판이 찌그러진 것을?’하고 말입니다.

 

 

출처 링크: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3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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