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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14.8.26

 

 

        지난 8월 14일부터 4박 5일 동안 이어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가톨릭 교회 내부의 행사라는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에 전방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교황의 방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직후에 행한 청와대 연설에서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후, 나는 교황의 방한 행보에서 그가 전한 ‘정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지켜보게 되었다. 연일 사람들과 아이 컨택(eye contact)을 하며 어린 아이를 안아 올리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는 교황의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마음의 울림을 주었으며, 세상을 응시하는 그의 면밀한 눈과 예리함 또한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방한 일정 동안 보여준 교황의 행보는, 내면의 빛이 의식의 범위를 넘어선 영역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그 무엇’(The kind of something)이었다. 나아가 교황의 방한은 그동안 이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던 기회이자, 또 교황이라는 한 인간을 매개로 온 국민이 소통과 유대감을 나눈 국가적인 치유 의례이기도 했다. 교황의 방한이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를, 교황이 말하는 ‘정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교황의 첫 공식 문헌인 <복음의 기쁨>에 의하면, 정의는 ‘가난한 자의 우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에 기반한다. 이는 약자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하고 공동생활 안에서 기쁨을 느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정의는 개인, 집단, 국가 등의 각 개별 주체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구심점이 되며, 이를 실현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교회이다.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당신의 첫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신앙의 감각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생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압니다. ... 가난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위대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 실질적이며 진실한 친밀감에 기초해야만, 가난한 이들이 걷는 해방의 길에서 우리는 그들과 합당하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198항)” 라고 말한다. 이 문헌을 발표하며 교황은 “비록 오랜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복음의 핵심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부 관습을 교회는 두려워하지 말고 재고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교회의 쇄신을 촉구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화는, 가시적인 교회의 확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과 부조리를 없애고, 전인적 해방을 통해 인류 공동체의 공동선을 증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이 방한 기간 중에 “이 시대의 순교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표명한 것 또한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방한 기간 동안의 교황의 말과 행동이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이를 안고 여러 사람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하는 소탈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교황이 우리에게 보낸 메시지의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교황은 “나는 당신들을 기꺼이 안아줄 수 있다. 위로든, 격려든, 조언이든, 당신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산은 당신들이 오르는 것이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안에 교황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환한 미소와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는 행보는, 단지 치유를 위한, 전쟁이 없는 평화 상태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켜 가자고 요구하는, 하나의 의례이자 상징이 아니었을까? 교황은 한국을 떠나는 고별사에서 “나에게 보내 준 성원과 열광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나의 말과 행동이 뜻하는 상징을 읽어 봐 주세요. 그리고 그 상징을 여러분이 먼저 실천해 보세요. 내가 한 것들을 따라하는 데 공을 들여 보세요. 나는 사실 답이 없습니다. 답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라고 하여, 자신이 영웅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의 한 인간임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빈곤과 억압이 없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을 망라한 현대 사회 안에서, 정의는 뜬구름 잡는 이상이나 공리주의적 해석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구성원의 의식의 변화를 통해 비로소 체제가 바뀌고 사회의 근본적인 쇄신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는 정의로운 사회는 ‘가난한 자의 우선적 선택’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언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가 선포한 ‘정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평화’일 것이다. 스스로 인간 내면의 지난한 고통을 치유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고통받는 다른 이를 끌어안는 정의,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우리 안의 의식적인 노력,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믿고자 하는’ 길들여진 안일함에 대한 반성, 이것이야말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가 아닐까? 가톨릭교회의 교종(敎宗)인 교황을 통해 신자가 아닌 이들도 함께 열망하고 치유 받고자 했던 몸짓이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만다면, 온 나라가 열광했던 교황의 방문은 퇴색하는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 기억될 뿐이다.

 

   

    교황이 떠난 지금, 그가 한국에 와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교황이 전하고자 했던 ‘정의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우리 안의 소통을 통해 가난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해결하고 극복해야 할 악임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을 뜻함을 기억하고 있는가? 왜 가난한 자를 통해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지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가? 교황이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한 “성질이 고약한 노총각, 노처녀가 되지 말라”는 말의 뜻을 헤아리고 있는가? 우리의 의식의 변화와 교회의 각성을 요구하는 그의 연대의식을, 그가 전하고자 한 상징을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몸짓과 메시지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최현주_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과 박사과정
religiosa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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