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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02호-세월의 눈금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 12. 26. 22:45

 

세월의 눈금

       

 

news  letter No.502 2017/12/26

 

 

로빈슨 크루소가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난파된 배에서 탈출하여 섬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서였다. 그는 그동안 만들어 놓은 거처의 문 앞에 기다란 말뚝을 세우고, 그 윗부분에 가로로 나무를 덧대어 큰 글자를 새겼다. “1659년 9월 30일 이곳 해변에 도착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매일 아침 그 말뚝 위에 조그만 눈금을 새겼다. 7번째 눈금은 두 배로 크게 만들어, 일요일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30번째 눈금은 좀 더 길고 컸다. 눈금이 365개가 되는 날이 되면 해가 있을 동안에는 금식을 하다가 해가 진 다음 약간의 음식을 먹었다. 그는 금식하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해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눈금을 새기는 일은 자신을 찾는 것이었고, 신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59-1731)의 로빈슨 크루소에게 중요한 점이 7일마다 돌아오는 일요일을 알고 기도드리는 것이었던 반면, 정학유(丁學遊: 1786-1855)의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1816)에서 조선시대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24절기에 맞춰 사는 일이었다. 24절기는 12달에 두 개씩 들어가며, 두 절기 사이가 보름이 되고(“이십사 절후는 십이삭에 분별하여 매삭에 두 절후가 일망(一望)이 사이로다.”), 세 달이 한 계절을 이루어 춘하추동을 거치면 한 해가 된다. <농가월령가>는 매월 농부가 때에 맞춰 해야 할 농사일과 세시풍속을 가사(歌辭)체로 적은 글이다. <농가월령가>에 따르면 지금은 11월로서 맹동(孟冬)과 계동(季冬) 사이인 중동(仲冬)이다. 대설(大雪), 동지(冬至)의 절기가 있고, “해짧아 멋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한” 때이다. 아낙네는 “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힘써 하고, 늙은이는 일없으니 돗자리나 매어보는” 시절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청교도적 개인주의의 상징이자, 영국식민주의의 전형을 나타내는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자립성, 계산 능력, 계획을 세우고 냉정하게 실현시키는 힘, 성적인 무관심, 과묵함의 자질, 그리고 이른바 야만인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과 지배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 그런 평가에 수긍하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가 목숨을 구한 “야만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붙였다. 야만인을 만나 구해준 것이 금요일이니,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삽화를 보면, 로빈슨 크루소의 발은 엎드려 있는 프라이데이의 어깨에 올려져있다. 그가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정복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니얼 디포의 작품에서 프라이데이는 결코 부속품의 지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1924-2016)가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1967)을 쓴 것은 그런 당연함을 전복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로빈슨 크루소와 “금요일”의 주객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소설 제목도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방드르디”, 즉 금요일이라는 야만인의 이름이다.

2018년의 한국에서 <농가월령가>에 나타난 세월의 눈금을 찾기는 어렵다. 농사의 리듬에 맞춰 사는 생활방식이 깨진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24절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그리 많이 볼 수 없고, 날씨예보하면서 양념처럼 언급될 뿐이다. 며칠 전에 지난 동지에 먹은 팥죽은 영양소의 측면으로 환원되어야 우리에게 겨우 의미를 지니게 되는 형편인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보여준 세월의 눈금은 어떠한가? 양력을 받아들여, 일주일의 생활 리듬을 체화한지 벌써 백년이 훨씬 지났으므로, 로빈슨 크루소의 눈금이야말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만하지 않은가? 일요일은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도 성스런 날로 취급하고 있으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모든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조차 특별한 날로서 붉게 표기된 날이 아니던가? 그런 맥락을 펼쳐서 지금 우리는 한 해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새해가 오고 있다고 설레거나 혹은 뒤숭숭해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세월의 눈금도 우리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무정형의 시간을 토막 내면서 자신을 찾고, 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던 로빈슨 크루소를 우리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억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고 있는 체제는 눈에 보이는 억압자가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을 선택하고, 자기가 원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돌아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탈진할 때까지 우리의 기력을 쏟아 부어야 생존할 수 있다. 잘못은 모두 우리 탓이므로, 살아남으려면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휴일은 방전된 배터리를 최소한으로 충전하는 기간일 뿐이다. 현재의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세월의 눈금을 감히 새길 힘이 없다. 미리 정해진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눈금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우리의 에너지는 뿌리 채 빠져나간다.


이와 같은 자책(自責)과 탈진(脫盡)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가 주체적으로 세월의 눈금을 새기고, 생태계의 리듬과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살아가는 일은 과연 무망한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 그 체제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시작이 열린다는 점이다. “하면 된다!” “불가능은 없다!”라는 구호를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탈진(脫盡) 체제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일을 멈추는 것, 그게 시작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눈금 안에 푹 잠겨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집중이니 몰입이니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니 하는 상투어를 올리지 않는 것, 빈둥빈둥과 게으름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는 것, 나아가 이런 이들이 모여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며 제 갈 길을 가는 달팽이 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런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체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2017년 한 해 동안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 따뜻한 격려와 후원을 베풀어주신 분들께, 또 한 해 동안 열심히 활동해주신 연구원 및 회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8년에도 변함없는 참여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 장석만 배상-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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