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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과 과보(果報)에 대하여

: 미투(#MeToo) 운동에 즈음하여 나와 우리를 성찰하다

             

                     news  letter No.512 2018/3/6

 

 

 


       끝이 없다. 연일 새로운 사건이 폭로될 뿐 아니라, 폭로의 영역이 제곱평방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반세기 가까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필자에게 여성혐오(misogyny)의 문화는 낯설지 않다. 미투(#MeToo)의 행렬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분야를 넓히며 지속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예상치도 못했던 이들이 폭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마침내 나는 나 자신에게도 검열을 시도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성적 혐오의 가해자가 되었던 적은 없던가.

  
       여성인 내가 이럴진대 남성들의 당혹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있었던 사실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있었을지도 모를 사실에 대한 두려움 나아가 장차 있을지도 모를 사실에 대한 두려움까지 포함한 가누기 어려운 당혹스러움이리라. 가해자로 지목된 또는 지목될 가능성의 범주에 있는 이들로부터 흔하게 접하게 되는 반응은 세 가지이다. 하나, 그런 일(일체의 성적 가해 행위)이 없다, 또는 성추행은 있었지만 성폭행은 없었다. 둘, ‘모종의’ 일이 있었지만 쌍방 합의에 의한 것이다. 셋, ‘자연스러운’ 행위까지 성적 혐오의 그것으로 몰리게 될 상황이 불안하고 불쾌하다, 남성을 잠정적 가해자로 간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첫째는 사실의 부인, 둘째는 해석의 차이. 이 둘은 실질적인 폭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반응이다. 그리고 셋째는 실제의 당사자가 아닌 이들까지를 포함하는 반응인 바, 가능태에 대한 반발이다. 이 모두는 처지의 차이에 대한 인식의 결여와 타인의 감수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한 가지 유형이 더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나의 잘못은 하느님께 모두 용서받았다는 셀프용서의 태도가 그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태도들이 어디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랴. 행위의 범주를 성적 일탈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성적 일탈과 관련된 행위에서조차도, 여성 또한 지위와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저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심지어 성별을 떠나 계급, 민족, 국적, 인종 등 분류 가능한 인간사회의 모든 범주에서 갖가지 사안에 대하여 동류의 태도가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에 대한 검열을 계속한다.


       저 같은 반응들이 본인의 마음에 비추어 거짓 없이 솔직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해를 시도해 본다. 첫째, 사실의 부인. 팩트의 어긋남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기억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일이 고발된 것일 수 있다는, 2차 가해가 되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겠다.) 어떻게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있을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몹시 중요한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처지가 다를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하지 않고 그래서 기억에조차 없는 일이라고 해서, 그 일이 존재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사건은 그 일이 중요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재고되고 발굴되며 재평가되어야 한다. 고통은 엄연한 실체다. 내가 기억조차 못하는 일로 인해 누군가 오랫동안 고통받아왔다면 응당 그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이 괴로운가. 어쩔 수 없다. 업보(業報)다.


       둘째, 해석의 차이. 어렵다. 의미는 모든 이에게 균일하지 않고, 그래서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기억하지 않는가. 영화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1950)의 주인공들이 판관 앞에서 엉망진창 제각각의 증언들을 내뱉었음을 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역시 앞서와 유사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처지와 감수(感受)에서 차이의 가능성을 감안하자는 것. 나의 당연함이 상대에게는 어색함일 수 있고, 나의 희락(喜樂)이 상대에게는 혐오(嫌惡)일 수 있다. 나에게는 합의로 여겨졌던 것이 상대에게는 강요로 다가왔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소통하자. 기미를 살피고 상대를 헤아리자. 인류의 DNA는 언어와 공감의 능력을 공연히 진화시킨 것이 아니다. 언어 외적 교감에 여하히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한 번 쯤은 말과 글로 확인을 시도해 보자. 행여 저항의 비명과 몸짓이 있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즉각 행위를 중단하자. 상대에게 승인받지 못하는 낭만은 외부로 표출될 때 추해진다. 그것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없다.


       셋째, 가능태에 대한 반발.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 공감과 지지를 받는 태도이다. 나는 이 반발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다. 내 마음의 결백함이 증명될 길을 얻지 못하여 일순 상대의 염려와 조심스러움을 목도하게 되는 상황이 그토록 억울한가. 오래 전 늦은 밤길을 걷던 중 바로 앞의 젊은 여성이 나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며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재촉한 일이 있었다. 나는 같은 여성이고 내가 그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할 일도 없지만, 그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부러 내가 이러한 사람이라고 소리 내어 말하기도 어색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저 내 걸음을 한껏 늦출 뿐이었다.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어린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그 아이의 뺨을 내 멋대로 어루만지지 않는다. 아이에게 나는 가능한 위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자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강자임이 상대방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일 수도 있다. 나의 무감각한 언행이 상대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다. 나의 자연스러운 일상의 행위가 누군가에겐 불쾌한 공포를 유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 그렇게 억울하면 차라리 힘을 모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든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서조차 이 사회의 일원이기에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외의 태도, 셀프용서에 대해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에서 미투 운동의 물꼬를 텄던 그 여검사의 폭로, 그리고 그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교회에서 했다는 “하느님께서… 저의 교만을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라는 간증. 많은 이들이 이 대목에서 영화 <밀양>(이창동, 2007)을 떠올렸다고 했다. 필자도 이 영화의 개봉 당시 ‘악의 현실과 구원의 방향성’에 대하여 고민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만(<영화 《밀양》이 제기하는 인간학적 성찰>, 《종교와 문화》 13, 2007), 다시 보니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초기 불전인 《아함경》에 나오는 한 인물의 이야기로 이 새로운 해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부처 재세 시에 앙굴리마라라는 흉악한 산적이 있었다. 그의 흉포함은 길 가던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은 뒤 피해자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나라에서는 높은 현상금을 매겨 그를 수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처가 짐짓 홀로 산길에 들었다. 앙굴리마라는 부처를 죽이려고 힘껏 따라왔으나 부처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더욱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마침내 앙굴리마라는 마음으로 굴복하고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뒤 그 나라의 왕이 부처의 처소를 방문했다가 곁에 앉아 있는 앙굴리마라를 보고 소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부처는 그가 이미 승단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국가권력의 제약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고, 왕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앙굴리마라가 시장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중 그를 알아 본 일단의 사람들이 그에게 욕을 하며 돌을 던진 일이 있었다. 슬픔에 가득 찬 알굴리마라가 처소에 돌아와 울며 부처께 그 사실을 고하자 부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앙굴리마라야, 너는 승단의 일원이고, 따라서 나는 너를 국가권력으로부터 보호한다. 그렇지만 네가 과거에 저지른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사랑하는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이 너를 비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


       이 이야기는 거듭거듭 나를 울게 만든다. 참회하는 인간, 새로 태어난 앙굴리마라조차 자신이 저지른 업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자신의 지난 과오를 괴롭게 뉘우치며 슬퍼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에게 남겨진 운명이었던 것이다. 업(業)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아무리 깊이 뉘우친다 해도, 행위에 대한 책임은 결국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용서는 마땅히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피해자들에게 빌어야 한다. 설혹 승속(僧俗)의 차이 또는 법망의 허술함으로 인해 법적 처벌을 피해나가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글을 써나가면서 나는 영 자기성찰과 참괴의 늪에 빠지고 만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진영의 문제도 아니다. 물타기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너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고,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세계 속에 모두는 모두와 이어져 있기에, 그의 고통이 나에게 이토록 아프고, 저의 행위가 마치 나의 그것만 같다. 부디 용기 있는 고백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나 또한 그 자리에서 함께 하겠다(#WithYou). 그리고 책임져 마땅한 이들이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법제적, 실질적으로도 본인의 과오에 상응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일에 힘을 싣겠다. 그리고 또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겠다. 다른 자리, 다른 입장에서, 나는 또 다른 이들에게 가해자가 되지는 않았는지를.




       * 최근 미투 운동의 흐름에서 권력관계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미투는 성적 피해를 입은 이들(특히 여성)이 SNS상에 자신의 생존을 고백하며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에 본고는 미투 운동의 성격을 일차적으로 여성혐오의 문화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하고 글을 전개하였다. 물론 여성혐오 자체가 양성 간의 권력 불균형을 반영하는 현상임을 전제한다. 다만 최근의 미투 운동에서 강조되는 ‘권력관계’란 양성 간의 그것보다는 직장 내의 위계 등 다소 협소한 의미로 통용되는 경향이 있기에, 잠정적으로 ‘(좁은 의미의)권력관계’와 ‘여성혐오의 문화’를 별도의 개념으로 분리하고 후자가 전자를 포함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 여성혐오의 가해자는 성별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명백한 사실이지만.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언급한바 “저 같은 반응들이 본인의 마음에 비추어 거짓 없이 솔직한 것”이 아니라, 회피와 협잡을 위하여 벌어지는 경우는 아예 고려의 대상으로조차 두지 않았음을 밝힌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전환기 민간 불교경험의 양태와 유산〉, 〈참법(懺法)의 종교학적 기능과 의미〉, 〈조선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 〈전통시대 한국불교의 도첩제도와 비구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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