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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톰슨(Samuel Thomson)과 ‘문재인 케어’

 

 

 

     news  letter No.525 2018/6/5                  

 

 

 

 


 “의사들은 그녀의 병명을 분마성 폐결핵(galloping consumption)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이 매우 적절한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의사들은 기수였고,

그들의 채찍은 수은, 아편, 그리고 황산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 9주간 그녀를 세상 밖으로 몰아댔다. 그녀는 1790년 3월 13일에 사망했다.”

-Samuel Thomson, A Narrative of the Life and Medical Discoveries of Samuel Thomson:

Containing an Account of His System of Practice and the Manner of Curing Disease

with Vegetable Medicine(Columbus: Javis Pike & Co., General Agents, 1833[1822])- 



       19세기 미국사회에서 전개된 건강개혁운동(the health reform movement)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명인 사무엘 톰슨은 그렇게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묘사했다. 그의 모친은 홍역에 걸렸다가 병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런데 톰슨은 모친의 죽음에는 의사들의 책임이 컸다고 확신했다. 당시 의사들은 독한 약물을 이용해서 환자의 몸에서 질환을 제거하는 공격적인 치료법에 의존했고, 톰슨이 옆에서 지켜봤을 때 그러한 치료법은 득보다는 실이 컸다. 톰슨은 의사들에게 받았던 치료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는 어떤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음을 느꼈고, 자신의 식물의학의 체계를 구축하면서 의사들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론에 함몰된 채 임상경험을 경시하는 의학교육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삼사년을 오직 ‘의학서 읽기(reading physic)’에만 몰두한 후에 의사 면허증을 거머쥔 자들이 의학의 영역에서 권위와 정당성을 누리는 현실에 분노했다. 톰슨의 분노는 의학교육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빈한한 삶의 조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일반인에게는 독해 불가능한 ‘문자 읽기’에 근거한 지식-권력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권력에 맹목적으로 종속된 채 자기 본성이 지닌 능력과 잠재력을 무시하는 평민의 무지에 대한 것이었다.


       19세기 미국사회는 개혁의 물결이 넘쳤다.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공중위생, 주택, 식생활, 의복 등과 같은 보건 및 생활환경에서부터 노예해방, 교육, 인권, 노동 및 여성 문제 등의 정치 영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시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구조와 환경을 구축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미국은 신이 선택한 영광스러운 국가이지만, 그러한 국가 건설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었다. 이 무렵에 인간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종교적 승인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형성되었다. 제1차대각성운동(1735~1755)에서는 칼뱅주의자들에 의해서 “인간의 타락과 도덕적, 영적 무능력”이 강조됐다면, 제2차대각성운동(1790~1840)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부패하고 무기력한 죄인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약화되었다. 그 대신에 인간에 구원의 신적 은총은 이미 주어졌으며 그것을 선택하는 결정은 바로 자기 손에 달렸다는 낙관적인 인간관이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인간관은 톰슨의 의학체계의 토대를 이룬다. 그는 건강과 생명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부분이 아니라 자기 관리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았고, 누구나 그런 능력과 자질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의 의학체계는 지식을 통해서 습득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하고 종교적으로 엄격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섯 살부터 집안일을 돌봐야했고 10살까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의 의학체계는 ‘자연’에서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식물의 왕국(vegetable kingdom)’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4살 무렵부터 호기심을 가지고 식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의 가족이 아플 때면 찾아와 돌봐준 ‘벤턴(Benton)’이라는 노파를 통해서 식물의 명칭과 약효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다. 노파는 그를 식물의학의 세계로 초대한 영혼의 안내자였다. 그리고 톰슨은 어머니의 죽음, 아내의 출산 후유증, 둘째 딸의 실명 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자신과 같은 평민들이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의학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시에 시골이나 지방에 사는 평민들이 의사들의 도움을 받기란 너무 힘들었고, 또한 비싼 진료비에 비해서 그들의 의술은 신뢰하기 어려웠다. 톰슨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의 종류와 질환의 증상에 따른 처방을 평민들에게 알림으로써 생명과 건강에 대한 자기 관리의 체계를 사회에 구축하고자 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의 활동 영역이며 신의 법칙이 새겨진 거룩한 서책이었다. 그리고 신은 자연 안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재를 마련하고, 또한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식과 안목을 인간의 본성에 새겨 놓은 은혜로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연에서 생명과 건강에 필요한 재료와 사례에 따라 적용하는 방법을 임상경험을 통해 구축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이었다. 톰슨은 자기가 알게 된 식물들의 약성을 직접 입으로 맛보고 여러 질병의 증상에 적용하면서 식물의학의 체계를 마련했고, 그러한 의학체계를 평민에게 익히게 함으로써 그들을 ‘자기 의사(self doctor)’ 혹은 ‘식물의학 가정의(botanic family doctor)’로 육성하고자 했다.

       톰슨의 의학을 오늘날의 의학지식으로 평가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오늘날의 의료 환경에서 그가 추구했던 생명과 건강의 주체적 존재가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의료산업은 지식기술과 자본의 결합을 통해 인간 생명의 깊숙한 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고 그 대리자들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자신들에게 이익을 안겨줄 사람을 환대한다. 환대받지 못하는 자들은 여전히 평민이고,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이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7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평균 나이 74.1세, 총소득은 1176만원, 노인 3명 중 1명이 일을 하고 그 중 70% 이상이 농·어업이나 단순노무직 종사자로 대부분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전체 소득 가운데 근로소득과 사업 소득은 각각 13.3%와 13.6%에 불과해서 대부분이 자식의 도움이나 연금 등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인의 90%가 평균 2.7개씩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21%는 우울증상을 지니고 있다. 지출에서 큰 부담은 주거관련 비용(30.4%), 보건의료비(23.1%), 식비(18.7%), 경조사비(4.4%) 순이었다.

       이러한 평범한 노인들이 병에 걸렸을 때 대기업이나 대학에서 운영하는 종합병원의 의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을까? 그나마 착하고 능력이 있는 자식들을 둔 노인들은 그런 시설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렇지 않은 궁핍한 가족은 어떻게 할까? 이러한 답이 없는 질문은 소위 ‘문재인 케어’를 둘러싸고 최근에 벌어지는 의료계 안팎의 모습에서 더 심란해진다. 그 복잡한 내막을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지만, 대략 현 정부는 건강보험의 적용 부분을 넓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고, 의사들은 그로 인해 발생할 수익 감소를 염려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의료계에서도 동네의원의 의사들이 주로 가입한 대한의사협회는 정부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는 반면, 대형병원들의 연합체인 대한병원협회와 같은 조직은 뚜렷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문재인 케어’를 바라보는 시선은 의료계에 안에서도 복잡한 듯하다. 그 복잡한 양상을 일으키는 핵심 요소는 당연히 ‘이익’이다. 동네의원의 의사들은 ‘문재인 케어’가 실행되면 현재와 같은 저수가(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진료비)의 상태에서는 수익이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 보고 있다. 단계적으로 저수가의 부문을 적정 수가의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정부의 약속에도 의사들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의사들이 ‘저수가’를 운운하지만 그들이 손해를 보면서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저수가가 병원 폐업의 하나의 요인일 수는 있지만, 전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동네의원은 진즉에 소멸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동네의원 의사들은 저수가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넘겨 볼 수 없는 경제적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2012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에 따르면 의사의 평균 1년간 수입은 대략 1억 500만원이라고 하니, 도무지 그들의 경제적 셈법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의 수익이 보장되어야 만족할 수 있는지 그 속은 참 깊기도 하다. 의사들이 감당하는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충분한 보상은 당연하다. 또한 정부의 의료정책에 의사가 무조건 순응할 필요도 없다. 다만, 톰슨의 시각에서 ‘문재인 케어’를 둘러싼 현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농치고 있지 않나 싶다. 당연히 하나는 사람이다. 톰슨은 자신이 겪은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자의 고난을 이해하고 다가서고자 했다. 그의 발언에는 그가 겪은 삶의 고통에 대한 탄식과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타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토착적인 지식이다. 톰슨은 노파의 지혜에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토착의학에 이르기까지 질병과 건강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이라면 무엇이든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점에서 그는 의사와 같은 지식 엘리트와 평민, 백인과 인디언, 그리고 중심 문화와 주변 문화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가능하면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생태환경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를 가지고 간편하게 질병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동의보감》에서 허준은 집필의 취지를 이렇게 말했다. “환자들이 책을 펴서 눈으로 보기만 한다면 허실, 경중, 길흉, 사생의 징조가 물거울처럼 확연히 드러나도록 하였으니, 거의 잘못 치료하여 요절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향약(鄕藥)의 경우는 우리 고유의 약물 이름과 산지, 채취시기, 가공법 등을 써놓아 쉽게 갖추어 사용할 수 있어서 멀리 구하여 얻기 어려운 폐단이 없도록 하였다.” 아마 평범한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정은 톰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날의 의사들도 이런 마음을 고이 간직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어디에서 오는지 한번 곱씹어 헤아려 봐주면 참 좋겠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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