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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32호-현장의 목소리, 기록관을 만날 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7. 24. 16:06

                                               현장의 목소리, 기록관을 만날 때

 

 

       news  letter No.532 2018/7/24                   


 

 

 

 


       ‘놀박’의 얘기다. 참 흔해졌다. 이들은 수년간 땅속에서 호흡하다 한여름 뙤약볕 보도블록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지렁이처럼 갑작스럽게 눈에 띈다. 눈에 척 달라붙는 것은 그들이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놀박들도 바쁘더라. 관찰해보니 농부가 굶어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고 놀박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땀방울 얼룩지며 ‘알’을 까고 있었다.


       ‘만나면 좋은 친구’인 줄 알았던 놀박들과 연대할 틈이 적어진 나도 익숙한 현장으로 나섰다. 그곳은 외양간 여물통에 어죽 끓여먹던 시절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그런 곳이다. 말하자면 그곳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국식’ 기억과 추억이 자작나무 숯불처럼 뜨겁고, 유쾌한 무용담이 골뱅이 무늬처럼 뱅글거리며 배꼽 빼는 이야기로 왁자지껄한 곳이다. 인류학적 현장은 대개 그러한데, 나는 그곳에서 좌판을 깔고 놀박시대를 건너는 1인 창업자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슬슬 답습할 대로 답습하고 있는 현장연구, 소위 <민속지(民俗誌)> 작업에 지쳐가고 있는 것 같다. 거칠게 말하면 현장연구는 대개 적당한 마을과 사람을 찾아내고 준비된 질문지로 제보자의 경험과 기억을 구술(口述)로 담는 일의 반복이다. 주제와는 별도로 연구방법론은 대동소이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전문연구자는 한국의 현장을 누비며 구술성(orality)을 극대화시키는 ‘아티스트’며, 조금 폄하하면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친 ‘6시 내고향’ 리포터나 대학생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의 ‘故학력자’로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구술사가 ‘역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는다는 목적과 자부심은 높이 살만하고 그 동안 성과 또한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충분’한가. 현장에 대한 구술사적 접근은 질문하지 못한 ‘사실’과 질문하여 얻은 ‘사실’ 사이에 항상 긴장을 안고 간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하는 볼멘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그 해묵은 불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자하는 ‘공공적’ 제언을 시도해보자. 먼저 지역학 전공 놀박에게 다음과 같은 연구용역이 들어왔다고 치자. 예컨대 “1950년대~2000년대 동해시 종교신앙 생활과 문화연구”와 같은 것 말이다. 십중팔구 기초자료조사를 토대로 현장조사로 이어질 것이다. 제보자들을 만나 녹취를 한 후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이때 간혹 예상치 못한 신선하고 진기한 정보와 구술을 바탕으로 그런대로 괜찮은 지역문화콘텐츠를 제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됐지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현재 한국의 시/군 단위에는 “기록관”이라는 곳이 있다. 이는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2017.9.22. 시행)에 따라 설치ㆍ운영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시청/군청을 포함하여 교육청이나 특별한 목적의 기관에서는 이러한 기록관을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기록사’를 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가령 동해시의 경우 정규직/비정규직을 포함하여 3명의 기록사가 현재 상주하고 있다. 올해 초 우연한 기회에 <동해시 지역사 자료조사ㆍ수집>(국사편찬위원회 발주) 작업을 맡아오면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그 과정에서 동해시 관계 공무원의 하해(河海)와 같은 ‘협조’를 얻어 “기록관”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단발성 방문에 불과했는데, 차츰 나는 이 자료들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더 집중하게 되었다. 왜? ‘촉(觸)’ 때문이었다. 놀박에게도 ‘감(感)’은 있는 법이다. 

 

                                           [1974년 박정희 각하의 소하천 정비사업 하사금 내역]

 

 


       고백하자면 이들 공공기관이 생산한 지난날 동해시의 자료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동안 써냈던 많은 지역의 <민속지>들은 부끄럽지만 구술인터뷰라는 한쪽 날개로 비행하는 위태로운 ‘삼류급’ 비매품에 다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인터뷰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꿰어 맞추기 위해 그 구술이 지닌 한계를 도서관에서, 집안의 고문서와 일기류와 사진을 통해 열심히 보완하고 있었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질문하지 못하고 들을 수 없었던 ‘드러나지 않은’ 과거에 대해 늘 조금은 괴로워했다. 태양같이 화려한 해바라기의 긴 줄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이 펼쳐지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고민이 주름이 될 무렵 “기록관”은 오아시스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어쩌다가’ 남게 된 기록관 자료들에서 놀박의 무한한 시간대역을 좀 더 할애하기로 했다. 그리고 놀박 본연의 최고 경지인 영혼의 희열과 시대와 불화하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맛보고야 말리라며 자주 동해시를 내려갔다. 희미한 형광 불빛아래 바퀴벌레처럼 납작 웅크린 채 때로는 짧게 가끔은 길게 ‘아아’, ‘아~~’하며 감탄사를 질러대는 오십을 바라보는 놀박의 놀음에도 까닭은 있었다. 그러니까 1970년대 서울이 근대 시민들로 ‘만원’이었다면, 비슷한 시기 동해시는 한국 산업화의 역군들로 만원처럼 기록되고 있었다. 놀박은 그렇게 고급진 관공서 기록물들의 틈바구니에서 서서히 하나의 날개가 돋는 것을 느낄 것도 같았다.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물을 관리하는 기록사와는 별도로 그 기록물을 일차적으로 해독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지역기반 공공기록물) 독해사’를 두는 것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민속학이나 인류학 그리고 종교학 등 지역 친화적 연구자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생각보다 근ㆍ현대 자료가 방대함은 물론이거니와 지역사 연구의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이 향후 그 지역만의 주체적이되 창조적이며, 개성적이되 보편적 미래를 열어가는 기회로 승화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 힘의 보고(寶庫)가 우리가 세금을 들여 기어코 지역의 기록관을 존립시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현장연구는 다시 ‘구술’과 ‘기록’의 두 날개로 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심일종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으로 〈유교제례의 구조와 조상관념의 의미재현: 제수와 진설의 지역적 비교를 중심으로〉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 〈유교제례에 담긴 조상인식의 다면성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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