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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50호-“자전거가 나간다, 길을 비켜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11. 27. 21:25

“자전거가 나간다, 길을 비켜라”


  
 

           news  letter No.550 2018/11/27

 


  

   자전거는 인간의 힘으로 움직여 가도록 만들어진 기계다. 효율적이고 공해가 없어서 인간이 만든 훌륭한 10대 발명품에 꼽힌다. 그 미덕은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오염과 난폭함에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산악자전거가 산길을 뭉개버리고, 걸어가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보고나서, 나는 자전거를 타는 방식이 중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두 개의 바퀴라는 의미의 바이시클(bi-cycle) 자전거가 언제 어디서 처음 나타났는지에 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대체로 19세기 서구라는 것은 모두 일치한다. 오늘날처럼 발로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자전거가 등장한 것은 1860년대다. 그 이후 자전거 타는 것이 보다 쾌적하게 된 것은 공기 타이어가 장착되고 나서다.

   이런 자전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1928년 12월에 발행된 《별건곤》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병신(丙申)년(1896)에 처음 탔다고 적혀 있다. 미국에서 자전거를 가져와서 타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어서 서재필에게 타는 법을 배운 윤치호가 미국에 자전거를 주문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자전거를 안경(眼鏡)차나 쌍륜차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먼 거리를 수월하게 다니는 것을 보고, 자전거를 탄 이가 양인(洋人)의 축지법(縮地法)을 배워 가지고 왔다고 여겼다. 《별건곤》의 다음 글은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獨立協會時代에도 여러 사람들이 徐씨나 尹씨를 보면 조화꾼이라고 負商패들이 함부로 덤비지를 못하며 또 한참 접전할 때에 그가 포위 중에 저 자전차 鍾을 한 번 울리면 여러 사람이 무슨 대포가 터지는 듯이 㥘을 내이고 도망하며 속담에 『眼鏡갑오』라는 말이 꼭꼭 맞는다고 떠들었다.”(《별건곤》 제16·17호)

    거칠기로 유명한 보부상들도 자전거를 탄 “조화꾼”에게는 겁을 집어먹고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재필과 윤치호의 자전거가 조선에서 가히 “양물”(洋物)의 마술적 위력을 보여주었던 듯하다.

    “그들이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무슨 요술이나 하는 것 같이 생각하여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서로 육박전을 할 때에도 그들에게는 감히 덤비지를 못하고 또 윤씨가 자전거로 빨리 내왕하는 것을 모르고 그가 차력을 하여 능히 일행천리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한다.” (《별건곤》 제44호, 1931년 10월)

    1884년에 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온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도 자전거를 처음 본 조선 사람의 반응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884년에 미군장교 한 사람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제물포에 정박 중인 자기 배에서 자전거 하나를 갖고 왔다. 말을 탄 알렌, 자전거를 탄 장교를 포함해서 일행이 큰 거리를 지나갈 때, 사람들이 자전거라는 처음 보는 물건을 보고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뒤로 넘어질 지경”이었다. 큰 바퀴 위에 탄 채,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지나가는 이를 보고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음을 터뜨렸다(H. N. 알렌, 《조선견문기》, 신복룡 옮김, 평민사, 1986, 106쪽; Horace. N. Allen, Things Korean, 1908). 알렌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가 자전거 타고 오는 것이 눈에 띠면 그 모습을 보려고 멀리서 기다렸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같은 길을 지나가게 하여 자전거 타는 것을 보며 놀라워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근처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사실 그곳에서 나는 그들이 나를 “나리”라고 부르며 인사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리”는 연장자나 관리에게 쓰는 말이다.”(104쪽)

   알렌은 아이들이 자신의 자전거를 타보게도 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서재필보다 조선에서 먼저 자전거를 탄 이들일 것이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진실하면서도 장난기가 있다...이 소년들에게 이 낯선 기계를 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처음에는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단 자전거를 타본 후에는 종을 마구 울리며 기뻐서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띠며 자랑스럽게 자전거를 달리는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다.”(104쪽)

   1929년 경성통계(京城統計)에 따르면 자전거의 수자는 12,832대이다(《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당시 경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30만 명 정도였음을 생각할 때, 자전거의 분포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회적 바탕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출현한다.

         찌르릉 찌르릉 비켜나셔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
         울 아버지 장에 갔다 돌아오실 때
         오물랑 꼬물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도 스르륵 타고 온다오.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
         울 아버지 사 오신 자전거라오.
         머나 먼 시골길을 돌아오실 때
         간들간들 타고 오는 자전거라오.

   동요 <자전거>는 1933년에 발표된 것으로, 목일신(睦一信: 1913-1986)의 노래 말에 김대현이 곡을 붙인 것이다. 목일신의 회고에 의하면 목사인 아버지에게 미국선교회에서 자전거 한대를 기증하였는데, 그 자전거로 교회를 순회하며 교역의 일을 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쉬는 날에는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었는데, 동시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원래 가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어물어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이다. 요새의 노래말은 “저기 가는 저 사람 조심하셔요/어물어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로 바뀌었다. 여러 곳에 있는 그의 노래비에도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다. 또한 “저기 가는 저 노인 조심하셔요.”라는 가사도 들은 적이 있다.

   영감 혹은 노인에서 사람으로 가사가 바뀐 것은 초등학교 아이가 길을 가고 있는 나이 든 이에게 당장 비키기를 강요하고 있는 태도의 방자함을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별로 이상함을 못 느끼다가 언제부터 이런 괘씸함을 느끼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자전거라는 새로운 “양물”(洋物)을 장착한 신세대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구세대의 비유는 바야흐로 20세기 초두부터 지금까지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근대종교란 무엇인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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