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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의 민중은 냉전체체 청산에 서로 협력해야



 

               news  letter No.557 2019/1/15      


  
  

 

      작년(2018) 연말에 이틀(12.24~25)간 일본 동북대학(東北大學)에서 한일 양국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동아시아가 공감(共感)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성>의 개념 구축’이라는 주제로 日本 東아시아實學硏究會와 원광대학 종교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다. 한일 근대 사상사를 전공한 학자 20여명이 모였다. 여기서 필자는 ‘평화와 통일 그리고 근대성-갱정유도(更定儒道)의 해원(解寃)과 개벽(開闢)의 만남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동아시아의 문화적 토대이나 근대 이후 지탄을 받아 온 유교(儒敎)가 한국 민중운동의 산실인 개벽과 결합해서 새롭게 형성된 민중유교의 평화와 통일운동에 관한 것이다. 이 사례를 보고하면서 필자는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평화구축을 위해 서구 근대가 남기고 간 근대의 과제, 즉 냉전체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양국 학자와 민중이 서로 협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래 내용은 동 발표문의 서문과 결론을 요약한 것이다.

      한국사의 근·현대는 서구의 근대를 수용하며 한편으로는 근대화의 기치를 들고, 한편으로는 저항하며 자생적 근대를 꿈꾸는 민중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에게 냉혹한 잔상(殘像)만 남겼다. 근대의 최대 과제였던 민족국가를 건설하지도 못하고 해방이후 냉전질서의 최전선에 서서 민족분단만이 아니라 동족전쟁까지 치른 한맺힌 상처만 남긴 것이다. 세계사에서는 냉전체제가 이미 해소되고 한국에서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체제의 고통 속에 있다. 철지난 냉전체제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얽매여 있는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모두가 민중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배반의 역사다. 서구 근대가 낳은 냉전체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않는 한, 냉전체제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이해 당사국의 과거사를 정리하기도, 동북아시아의 평화 구축도 쉽지 않을 것이다.

     미소냉전체제의 도입은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일본은 전쟁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1) 그러나 분단된 남북은 양 진영의 최선봉에 서서 동족 간 대리전까지 치러야 했으며, 이후 남북에 적대적 공존을 위한 분단신화가 체제내화(內化)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남북의 평화통일논의는 남북 민중이 배제된 채 패권 국가들과 남북 지배권력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민족공동체의 입장이 아니라 분단국가주의 입장에서, 남북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입장에서, 그리고 타자를 배제하는 세속적 이념에 기반을 두고서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패권국가나 지배권력 중심의 분단국가주의나 세속적인 이해나 이념만으로는 평화통일에 관한 진정한 논의는 불가능하다. 여기에 강대국들의 분단 관리도 큰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고 민간차원에서 민족분단에 대한 거부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2) 그러나 그것은 분단 초기에 잠시 일어났다가 한국전쟁 이후에는 거의 소멸하고 말았다. 이는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의 주장에 의하면, 서구적 근대에 저항한 민중운동은 대체로 토착문화를 기본 축으로 하는 ‘토착적 근대화’를 지향한다.3) 토착적 근대화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를 만들어내려는 민중운동이며, 토착문화는 서구 세속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토착적 전통문화이기 때문에 종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런데 서구의 근대는 이런 토착적 종교4)들을 개인의 내면에 가두고 종교의 초월성을 국가의 절대성으로 포섭한다. 근대국가의 절대성은 제국주의 성향으로 이어져 민중의 차별과 억압을 가져오게 되므로 토착종교는 이에 저항하는 동시에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새로운 근대5)를 제시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이 같은 역할을 수행한 토착종교가 바로 동학(東學)을 비롯한 근대 ‘개벽종교들’이다.6)

     그러나 해방이후의 개벽종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종교들은 ‘해원과 개벽’의 종교 형식을 가지기는 했으나 본래적 이상을 외면하고 도리어 냉전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해방이후 냉전체제를 거부한 민족종교도 적지 않았다.7) 그러나 냉전체제가 폭발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거의 소멸하고 만다. 이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4.19혁명이 있었으나 그 혁명은 반(反)냉전체제의 민중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반냉전체제 성격을 띤 평화통일운동은 개별사건으로는 없지 않았지만8) 종단차원에서 전개한 것은 갱정유도의 평화와 통일운동이 유일하다.

     필자의 발표문은 조선유교가 지난한 근대 대응으로 출발해 ‘해원과 개벽’의 민중종교로 등장하기까지의 과정과 그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갱정유도가 1951년 본격적인 행도체제를 갖춘 이후 걸어온 민중유교의 길과 평화개벽의 길을 개괄적으로 살폈는데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적 성격에 관한 것으로, 갱정유도는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전통유교이면서 동시에 민족과 시대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 실천적인 도덕해원과 도덕문명의 개벽을 주장했다. 조선말기 망국의 책임을 덮어쓴 조선유교는 서구 근대를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혹독한 비판대상이 되었다. 당시 유교는 다시는 종교로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1950년대 ‘해원과 개벽의 옷’을 갈아입고 개벽종교의 막내로서 다시 이 땅에 등장하였다. 민중유교로 변신한 것도 그렇지만, 갱정유도는 여전히 고전도덕의 종교로서, 전통유교의 재흥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도 갱정유도인들은 한복을 고수하고 두발을 보존하며 도덕문명이 지배하는 ‘개벽의 시대’를 상징하는 ‘봄[春]’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 사회적 역할에 관한 것으로, 갱정유도는 세속적 이해나 이념을 넘어선, 인륜도덕의 관점에서 만국평화와 평화통일을 바라보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평화와 통일의 종교다. 해방이후 주로 기독교형 개벽종교들이 분단신화에 함몰되어 남북갈등을 더욱 부채질하는 가운데서도, 반공(反共)을 국시로 삼은 분단냉전체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항하였다. 또한 국가가 분단을 외면하고 조국근대화의 이름으로 경제개발에 매진할 때, 갱정유도는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에 대해 도덕해원과 도덕문명을 주장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평화와 통일에 대한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셋째, 근대적 성격에 관한 것으로, 갱정유도의 등장은 토착적 근대화의 대표적 사례다. 개항 이후 한반도에서는 서구 근대화가 줄곧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서구 근대가 남긴 민족분단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 이에 대한 공개적 저항과 해결은 서구의 근대를 넘어 새로운 근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남북분단을 야기한 냉전체제와 물량적 성장에만 치중하는 근대화에 대해, 인륜도덕과 개벽의 힘으로 공개적으로 저항한 갱정유도의 평화통일운동은 토착적 근대화의 길로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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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년 포츠담회담과 1947년 파리협정을 통해 패전 독일의 전후처리에 대해 연합국과 주축국 간에 합의가 이루어짐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전후질서가 확립되었으나 일본과 한국 등 동북아시아의 경우유럽과 달리 태평양전쟁의 전후 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봉합되고 말았다. 미국은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패전국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를 중단하고 미국의 동맹국으로 격상시키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현재 갈등을 빚고 있는 독도와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의 영토문제, 과거사 문제 등이 모두 미완의 영역으로 남게 된 것이다.

2)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화되자 제주에서는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바로 제주 4·3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였다. 또한 연이어 여수·순천 10·19 사건이 1948년 10월 19일 밤 8시에 일어났는데, 이는 제주 4·3 사건의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지역 주둔 군대 내부의 좌익 세력들 일부가 제주 4·3 사건 진압을 반대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3)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새로운 근대를 찾아서-‘토착적 근대론’의 제안>, 《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 원불교사상연구원, 2018, 21쪽 참고; 제38회 원불교사상연구원 (한일공동)학술대회 “한국의 근대를 다시 묻는다.”

4) 기타지마 기신은 토착적 종교에는 서구 근대성과는 다른 ‘무한하게 이어지는 상호 연관성, 차이와 평등의 공존, 비폭력 평화주의, 세속적 정치권력의 상대화, 타자에 대한 존경, 과거현재미래의 미분리성, 안으로부터 열리는 영성 등과 같은 관념들이 들어 있다고 지적한다.(기타지마 기신, 위의 글, 21쪽)

5) 통칭하여 ‘비서구 근대’ 혹은 ‘자생적 근대’라고 할 수 있으나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토착적 근대’(가타지마 기신), ‘대동적 근대’(김창규, 《중국의 근대와 근대성》, 경인문화사, 2018), ‘유교적 근대’(미야지마 히로시, <유교적 근대론과 한국사 연구>, 제12차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 2018), ‘영성적 근대’(조성환, 《한국의 근대 탄생》, 모시는 사람들, 2018) 등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6) 최근 동학을 비롯한 개벽종교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종교의 특성, 나아가 자생적 근대 내지 토착적 근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필자도 개벽종교의 종교적 특성을 근대적 가치를 수용한 근대종교로서, 민중의 고난과 삶을 담은 종교이자 근대 개혁된 전통종교나 서구 문명종교와는 다른 한국의 제3의 자생적 근대종교라고 지적한 바 있고(윤승용,《한국의 신종교와 개벽사상》, 모시는 사람들, 2017, 264-274쪽), 조성환은 동아시아의 ‘개벽과 근대’를 논하면서 서구의 근대가 아닌 한국적 근대의 특성을 동학의 개벽에서 찾고 있다. 그는 동학의 ‘민중도덕과 살림영성’을 지적한 다음, 서구의 이성적 근대와 다른 한국의 영성적 근대를 주장하고 있다.(조성환, <개벽과 개화: 근대한국사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근대 한국종교의 토착적 근대화 운동》, 원불교사상연구원, 2018, 76-82쪽.)

7) 대표적으로 대종교의 분단반대 운동과 천도교의 ‘3.1재현운동’을 들 수 있다.

8) 대부분 간첩단 사건이거나 북한의 고무 찬양죄에 의한 개별적인 사건이다. 비교적 큰 집단적인 사건으로는 1965년 도종예를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사건(人民革命黨事件)’ 정도다.




      


윤승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논문으로 〈한국사회변동에 대한 종교의 반응형태 연구〉,〈근대 종교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방안〉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공저),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공저),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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