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562호-기억의 정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2. 19. 18:17

                                          기억의 정치


 

                                  news  letter No.562 2019/2/19  

 


 


  
  
     
      오이코스학교(Oikos School)의 겨울 프로그램을 오키나와에서 ‘평화’를 주제로 진행했다. 오이코스학교는 신학대학에서의 교회와 교단을 위한 제도권 교육을 넘어 시대를 읽고 응답하는 대안적 신학교육을 위한 모임이다. 오키나와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오키나와는 일본이면서도 일본과 달리 오히려 남방의 정취를 더 많이 담고 있는 이국적인 관광의 섬이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관광의 섬인 동시에 ‘기지의 섬’이다. 일본 국토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이곳에 재일 미군기지의 4분의 3(74.6%)이 집중되어 있다. 오키나와 문제는 제주의 강정마을과 연계된 역사 현장이다.

      오키나와는 동아시아의 굴곡진 역사의 현장 가운데 하나이다. ‘류큐(琉球)왕국’으로 중화세계체제 속에서 자치왕국으로 존재했으나 동시에 명나라의 조공국이었다. 하지만 1609년 사츠마번(현재의 가고시마)의 침입이후, 오키나와는 명/청 및 사츠마/에도 막부 양속체제(1609-1879)로 지속되다가, 근대 일본제국으로의 병합(1879-1945)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 통치(1945-1972)를 받고, 현재 일본으로 재편입(1972 이후)된 굴곡의 근현대사를 겪어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오키나와 전체주민의 4분의1이 사망한 오키나와전투의 참상을 고스란히 새기고 있고, 전전 일제하에서나 전후 미군 통치기에 지속적으로 희생을 당해 온 곳이 바로 오키나와이다. 역사의 층위가 다양한 만큼 해석과 판단이 정교해야 하는 곳이 바로 오키나와이다. 오키나와 탐방을 통해 이곳에서 평화는 무엇으로 이해되고 있을까를 확인하고 싶었다.

     여러 현장을 탐방했으나 두 곳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히메유리 평화기념관과 평화기념공원이다. 두 곳 모두 좀 나이브하게 표현하자면 전쟁의 파괴와 아픔을 교훈삼아 세계평화를 이룩하자는 의미를 새겨 둔 곳으로 보인다.

    오키나와 남쪽 이토만시의 히메유리 탑과 기념관은 2차 세계대전 말미인 1945년 3월-7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공략하면서 벌어진 오키나와 전쟁 당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내몰린 학생들을 기리는 장소이다. 미군 상륙 후 오키나와 여자사범학교와 현립 제1고등여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당시 21개 학교 학생들은 ‘히메유리 부대’로 편성되어 일본군 사상자를 돌보는 간호부대와 수송부대로 배치되었다. 미군에 포위된 상황에서 1945년 6월 18일 갑작스런 ‘해산명령’으로 학생들은 사살, 자살 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의 희생과 참상을 기념관은 보여주고 있다. 히메유리 동창회는 히메유리 평화기념관 설립에 대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쟁터로 향하게 했던 그 세대 교육의 무서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평화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학우와 교사를 위한 진혼이라 믿습니다."고 적고 있다.

     히메유리 평화기념관에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부니 언덕에는 평화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기념공원의 자료관에는 오키나와 전쟁에 관한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담은 여성과 아이들의 모습, 전쟁 생존자의 증언, 전쟁의 파괴와 죽음이 담긴 무거운 전시이다. 공원 내의 평화의 초석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가해자 피해자 모두가 ‘평화’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두 곳의 방문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선 죽음 앞에서 느껴지는 당연한 심리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말하는 평화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오키나와 전쟁에만 집중하여 조성된 히메유리 평화기념관과 평화기념공원, 철저히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전시형태는 이어지는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이 기념관과 공원을 조성했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역사는 기억을 통한 재현의 결과이다. 같은 시간, 같은 현장을 경험해도 어떤 위치에서 그 시간과 공간을 관통했느냐에 따라 기억은 다르게 구성되고, 그 역사의 재현은 다를 수밖에 없다. 로마시대 콜로세움에서의 처형 장면이 시각에 따라 범죄자의 공적 처형으로, 정치적 엔터테인먼트로, 처형자가 교회의 수장이라면 순교자로 기억되어 다른 이야기들이 생산되는 것은 한 예이다. 동시에 자신의 위치에 따른 시공간을 경험한 기억은 현재 자신의 위치에 따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의 창조자와 그것의 수용자가 찾는 그 의미는 늘 동일시 될 수 없고, 재현 매체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기억은 양산될 수 있다. 특히 기억의 역사를 기념물로 문화화하는 주체는 대개 국가 혹은 그 내부의 유력 집단이다. 기념의 권력 주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념한다. 이런 점에서 ‘기념’은 권력체제의 유지를 위한 기억의 정치이다.

    오키나와의 히메유리 평화기념관, 평화기념공원이 말하는 ‘평화’가 내포하는 본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평화기념관과 기념공원의 설립주체와 과정, 그리고 누구의 기억을 담고 있는지 그 복잡한 층위를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다. 오키나와의 굴곡진 역사만큼이나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역사 해석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역사학자 설혜심은 “역사학은 오직 엄정한 사료의 구성 위에 존재해야 한다. 동시에, 그 사료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고, 욕심을 가지고, 꿈꾸는 존재이다”고 말한다(설혜심, 『온천의 문화사: 건전한 스포츠로부터 퇴폐적인 향락에 이르기까지』, 한길사, 2002, 279쪽). 기억의 ‘객관, 사실, 엄정성’등을 통해 재현된 역사는 결국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그것도 거짓, 욕심, 욕망을 품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다. 오늘 기억을 통해 재현되는 역사의 위치를 정확히 표현했다고 본다.




      


최상도_
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주요 논문으로 〈순교담론의 패러다임〉, 〈한국교회 순교신학 정립을 위한 순교담론연구 -손양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