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불교(religious Buddhism)’와 ‘세속불교(secular Buddhism)’, 양립가능한가?
- 서구불교(Western Buddhism)가 던진 새로운 질문 -
newsletter No.649 2020/10/27
(테라바다 사원의) 스님이 장엄하게 말했다. “빌 게이츠는 그의 전생에 큰 공덕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기를 간절히 – 절망적으로(desperately) - 바라면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스님은 말을 이어나갔다. “왜 이 세상에 부자와 특권층의 차별이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붓다는 ‘공덕(merit)’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 돈 소여, 〈두 붓다〉1)
가끔 일반인들의 잡지 기고문 등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 해 온 종교적 관념과는 다른, 살아있는 체험과 의견을 더 생생하게 접하는 경우가 있다. 앞에 인용한 빌 게이츠에 대한 돈 소여(Don Sawyer)2)의 글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캐나다의 작가이자 교육자, 사회활동가인 돈 소여는 자신이 잠시 불교에 입문했던 경험을 뉴스잡지 《브라이어패치(Briapatch)》(2008년)에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은 캐나다 현지의 한 사원에서 불교에 접한 한 서구인의 경험을 흥미롭고도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두 붓다(Two Buddhas)〉라는 제목의 이 글은 〈두 개의 불교〉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돈 소여의 글의 요지는 그가 합리적 종교라고 기대했던 (테라바다)불교에 윤회(samsara, reincarnation)와 업(karma, 과거든 현재든 모든 행위는 미래의 경험을 창조하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생각)이라는 불교의 도그마가 있고, 또 그에 대한 신앙(faith)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실망했다는 스토리다. 일찍이 무신론자였던 그는 불교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비유신론적 종교(only non-theistic religion)’로 생각하고 특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에게 불교는 자비·인내·친절·평정심을 강조하는 매우 이성적인 종교로 보였다. 또 달라이라마가 스스로를 “반은 공산주의자, 반은 불교도”라고 묘사한 것도 맘에 들었다. 그는 몇 년간 테라바다 사원의 정기적인 아침 명상과 주중의 불교도 모임에 참석한 것은 물론, 다양한 불교문헌을 읽는 등 나름대로 불교에 다가가려 노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배교자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서구불교가 캐나다에 폭풍처럼 불어 닥쳐, 불교사원, 명상그룹, 불교잡지와 논문 등이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불교가 이른바 새로운 고향(new home)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돈 소여가 이상적으로 동경해온 불교는 바로 그 서구의 ‘새로운 고향’의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을 반영하여 재해석된 불교였다. 말하자면 그가 믿고 동경했던 불교는 아시아의 전통불교가 말하는 윤회사상과 업설 모두를 용인한 불교는 될 수 없었다. 돈 소여는 이렇게 말한다.
‘붓다의 가르침과 지혜에서 더 큰 행복, 이해, 자비를 위한 개인적, 사회적 지침을 찾던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불교의 교리적 핵심(a doctrinal core)을 발견하고는 종종 놀란다. ‘윤회’와 ‘업’의 관념은 그들에게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고, 일반적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불교도들은 그것을 경시하거나 재해석해왔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그것의 경직된 사회적, 정치적 태도를 경험해온 많은 서양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와! 우리는 정말 한 세트의 미신을 다른 미신과 교환하길 원하는가?”
그는 전통 불교에 대한 자신의 강한 의문을 “불교의 원리를 포용하기 위해 우리는 꾸며낸 한 이야기를 죽음을 부정하는 한층 더 불가사의한 다른 이야기와 교환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하고 있다. 돈 소여가 말하는 ‘두 붓다’ 혹은 ‘두 불교’는 ‘서구의 맥락에서 재해석되고 적용된 불교’와 ‘아시아의 전통적 맥락 그대로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이 두 불교가 매우 이질적이어서 양립이 가능할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빌게이츠의 현생에서의 부(富)가 전생의 공덕이라고 말하는 승려에게 돈 소여는 동의하지 못한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이 인간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결코 전생에서부터 넘어온 결과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생의 업을 강조하는 것은 “불평등의 합법화이며 변호가 될 뿐”이라고 비판한다. “업”과 “인과율”도 전통적 의미의 삼세(三世, three lifetime)라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생애(this lifetime)의 사안으로 본다. ‘업의 흔적들(karmic traces)’은 전생에 잘못 살았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오히려 이 생애 동안 대부분 무심하게 형성된 패턴들, 그리고 그 패턴들이 습관적인 행동으로 이끌어 결국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본다.
그에게 문제의 초점은 윤회의 사이클로부터의 탈출이나 감각의 소멸이 아니다. 그보다는 행복의 발견, 친절, 자비, 올바른 행동을 통해 이 세계 안에 참여하는 의미 있는 방법들을 기르는 매일의 과제에 맞춰져 있다. 그가 불교 수행을 선택한 것은 “보다 충족된 삶으로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더 건강하고, 더 기능적인 사회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돈 소여가 지향하는 불교는 서구의 한 불교 흐름과 일치하며, 그것은 오늘날 ‘세속불교(Secular Buddhism)’라는 이름으로 대변되고 있다. 세속불교의 주요 이론가로는 스티븐 배철러(Stephen Batchelor)를 들 수 있다. 배철러는 우리나라에서 『붓다는 없다』(2001)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 『믿음 없는 불교: 깨달음에 대한 현대적 안내(Buddhism without Beliefs: The Encounter of Buddhism and Western Culture)』(1997)3) 등의 저자로 세속불교의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4)
이런 ‘세속불교’에 대한 비판·견제가 만만치 않은 것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돈 소여는 이러한 대항적 흐름을 ‘불교 근본주의(Buddhist fundamentalism)라는 골치 아픈 브랜드의 재강화’라고 규정한다. 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흐름의 대변자는 영화 〈더 컵(The Cup)〉(1999)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종사르 잠양 켄체(Dzongsar Jamyang Khyentse)5), 그리고 빅쿠 보디(Bhikkhu Bodhi)6)와 크리스토퍼 팃무스(Christopher Titmuss)7) 등이다. 팃무스는 이른바 ‘세속불교’의 관점은 너무 협소하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빅쿠 보디는 전통적 의미의 ‘윤회’ 교리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배철러, 빅쿠 보디와 팃무스 모두 “종교적 불교(religious Buddhism, 혹은 religious Buddhists)”와 “세속불교(secular Buddhism)”라는 명칭으로 불교를 크게 양분하여 묘사하고 있다. 불교 내에서 ‘종교’와 ‘세속’의 범주가 서로 경쟁하는 개념적 대립쌍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세속불교의 흐름과 문제의식은 앞으로도 서구인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속불교에 대한 호응이 커질수록 ‘세속불교’와 ‘종교적 불교’ 사이의 논쟁도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과연 ‘세속불교’를 불교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
1) Don Sawyer(2008), “The Two Buddhas: karma-free dharma and its discontents”, Briarpatch, Aug. (https://briarpatchmagazine.com/articles/view/the-two-buddhas). 이 글의 “빌 게이츠(Bill Gates)의 업의 보상(karmic reward)” 부분.
2) 브리티시 콜롬비아 거주. 소설과 저서 50여 권 집필. 캐나다 오카나간(Okanagan)대학 국제개발센터 디렉터로 아프리카개발계획 담당. 원주민 문제와 환경개발 등 다수의 책 출간.
3) 이 맥락에서 믿음(belief)이란 “업과 윤회 등 초경험적 사실과 관련된 불교교리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야야 할 것이다. 불교 전체에 대한 믿음을 거부한다면 불교도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4) 이 세속불교와 관련한 필자의 논문 〈서구 ‘세속불교’의 도전과 기회 – 불교의 세속화와 근대성, 어디까지 가능한가?〉(《불교연구》 53)가 있다. 이 글은 그 논문의 연장선상에 있다.
5) 부탄 출신의 티베트 승려. 작가이자 영화제작자.
6) 미국 뉴욕 브루클린 출신 유대계 테라바다 승려. 그의 “Buddhism without Beliefs: Review”(Journal of Buddhist Ethics, 1998) 참고,
7) 영국 출신 전 테라바다 승려. 그의 “12 Reasons why I am not a secular Buddhist”(Christopher Titmuss Dharma Blog, 2018) 참고.
송현주_
순천향대학교 교수
논문으로 <서구 근대불교학의 출현과‘부디즘(Buddhism)’의 창안>,<한용운의 불교·종교담론에 나타난 근대사상의 수용과 재구성>,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