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호-제4차 종교문화탐방을 마치고-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박상언)
"제4차 종교문화탐방을 마치고 :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금식기도원"
2010.7.20
애초에 지난 달에 예정되었던 탐방 일정이 한 달 연기되면서 참석하기 어려웠던 길이었다. 탐방 일정 중에서 ‘한국 기도원의 현황과 전망’(자료첨부1)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탐방 일정이 미루어지면서 참석하기가 어려워져 원고만 보내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해 놓았었다. 그러나 감상문에 가까운 글만 달랑 보내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서 뒤늦게 발걸음을 기도원 쪽으로 내딛었다.
이번 길이 초행은 아니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신학과 일반 학문 사이에 고민했던 나는, 교회의 누군가에게 들은 어느 ‘유명한’ 기도원에서 마음의 결정을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바로 오산리 기도원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예배당(성전)과 기도굴이라 부르는 조그만 개인기도실, 그리고 이층 침대가 놓여 있는 숙소, 집회 때마다 인도자의 열정적인 설교와 기도, 신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과 간구, 그리고 울며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록 그 분위기에 눌려 남들처럼 열심을 내어 기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돌아갔지만 말이다.
점심 식사 시간에 기도원에 도착하여 식당에서 먼저 도착한 일행과 합류했다.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선생님들과 연구소 친구들이 눈에 들어오자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도착한 일행은 기도원의 김원철 원장님과 함께 오산리 기도원과 순복음교회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고, 또한 전국에 있는 기도원들을 거의 대부분 다녀보셨다는 원장님으로부터 한국 기도원의 주요 흐름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자료첨부2)고 한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기도원에서 우리의 안내를 맡은 전도사님의 인도로 기도원의 이곳저곳을 둘러 볼 수 있었다. 기도굴로 불리는 개인 기도실, 기도원을 설립한 최자실 목사 기념 공관, 기도원의 설립 이래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종탑, 길 양쪽에 울창한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승리로’, 기도원 내의 공동묘지와 그 정상 부근에 위치한 ‘엘리야 고지’ 등, 발걸음 닿는 곳마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도사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어두워지면 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기도 장소로 알려진 공동묘지와 엘리야 고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옛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곳에서 기도하려는 까닭에 대해 전도사님은, 엘리야 고지가 영적 “파장이 가장 큰 곳”이기도 하고, 공동묘지이다 보니 캄캄한 밤에 기도를 하다가 내려가기가 무서워 환해질 때까지 기도에 전념할 수밖에 없기에 기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집에서 교회를 가려면 조그만 야산을 넘어가야 했었다. 그 산길로는 30분 정도면 걸어서 교회에 도착할 수 있지만, 다른 길로 가면 한 참을 큰 길까지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가야되는데, 시간도 오래 걸렸고, 차비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그 산길 옆에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들이 있었고, 게다가 그곳에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도 나돈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괜찮지만 어두운 저녁에 그곳을, 그것도 혼자 지나가려면, 여간 ‘신심’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손전등을 켜고 산 길 초입에서 크게 한 번 숨을 들여 마시고, 찬송가를 목청이 찢어져라 부르며 산길을 치달려 올랐다. 산머리에 올라 불이 켜진 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제야 살았구나, 안도하며 교회로 진 빠진 발을 옮겨 놓곤 했다. 신에게 온 마음을 쏟기 위해서는, 그것이 ‘공포심’이든, 뭐든지 간에 산만한 감각을 제어할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가 보다.
기도원 시설을 둘러보고 기도원 측의 배려로 시원한 세미나실에서 ‘한국 기도원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세미나 시간을 가졌다. 일정 관계상 토론은 뒤에 하기로 하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소성전으로 이동했다. 도착한 성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었고, 강사 목사의 설교가 흐르고 있었다. 곳곳에는 오랫동안 머물 작정을 하고 기도원을 찾았음을 알려주는 짐들을 옆에 쌓아둔 신자들이 간간히 보였고,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을 데리고 온 중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 설교 내용을 꼼꼼히 메모하는 모습들, 시시때때로 ‘아멘’으로 설교에 응답하는 소리들, 그런가 하면 오랜 여정에 지쳤는지 잠시 잠에 빠진 모습들이 기도원 내부의 독특한 색깔을 빚어내었다. 설교의 요지는 모든 고통의 배후에는 귀신이 있으니,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도 상세히 알려주었다. 특히 여러 병명을 언급하며, 귀신을 쫓아내면 그런 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기도원에서 형성되는 귀신 담론과 ‘신유’의 종교현상을 좀 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를 마친 후 다음 일정까지 여유가 있어 동네 가게에서 군것질을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기도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만나기로 한 전도사님을 기다리며 세미나 발표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교회가 없는 기도원의 존속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물음, 그리고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침묵>에서 침묵이 일상이 되고, 웃음이 비일상이 되어버린 그 통제의 문화현상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생각할 거리로 남아 있다. 우리가 약속 시간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우리를 찾아 기도원을 헤매시던 전도사님을 간신히 만나 군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유명한 중국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저녁 예배에 참석하고 공동묘지를 다시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할렐루야기도원과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말씀해주신 선생님의 이야기가 머리에서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내게 그 이야기는 과학적 사실과 종교적 믿음이 삶의 현실에서 반드시 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정리되었다. “아픈가? 기도하면 하느님의 권능으로 나을 수 있다.” 의학적으로는 나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종교인의 모습을 우리가 어리석다 말할 수 있을까? 또한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신에게 간구하는 그들이야 말로 정말 강렬한 신앙의 열정을 지닌 자들이 아닐까? 전국에 대략 600 여개의 기도원이 있다고 한다. 그곳을 찾는 많은 종교인들이 삶의 문제에 위기를 느끼는 자들일 것이다. 그 구체적인 이유야 가지각색이겠지만, 궁극의 지점에는 지금과는 다른 삶이기를 바라는 탈세속 혹은 탈현실의 바람을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내게도 그 바람이 세차게 일렁이니 이참에 기도원에서 맘껏 풀어내어 볼까 싶다.
박상언_
서강대 연구교수 laetor@hanmail.net
주요 논문으로 <개신교 주일예배의 변용과 특성>, <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