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101호-함석헌 현상과 함께 한 종교학(이민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1. 4. 20. 15:23

함석헌 현상과 함께 한 종교학




2010.4.13

*이글은 <종교문화비평>17호(3월31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입니다.


학술지의 특집으로 한 인물, 그것도 우리시대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는 인물을 주제로 삼는 데는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다. 가을 학술대회의 결실이라고는 하지만 “왜 함석헌인가? ”하는 새삼스런 의문을 제가 할 수밖에 없다. 형태를 달리한 또 하나의 우상화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종교학의 영웅을 부각시키는 작업으로 생각 될 수도 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한 인물의 평전을 논의하는 것이 종교학계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평전도 훌륭한 하나의 텍스트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평전 텍스트는 시대정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점을 고려하면서 이 특집은 관련 학자들에게 자극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인다. 이 시대의 이슈를 함석헌을 통해 다시 보게끔 하려는 것 말이다. 뉴라이트를 표방하며 보수적 기독교편향으로 이끄는 사회분위기 및 이에 대한 반발, 특히 불교계와 가톨릭계의 반응, 그리고 순수한 종교인에 대한 추모의 정서가 한데 어울려 함석헌에 대한 논의가 펼쳐진 것이 아닌가. 함석헌에게는 이런 요인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진단하는 종교학적 기제로서 함석헌이라는 주제가 성공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리고 특집의 이런 의도들이 어느 정도 적중했다고 본다. 다만 인물평전을 다룰 때 흔히 빠지게 되는 감추어진 함정들을 어떻게 돌파하는지가 문제다. 함석헌 숭모, 개인의 신화화, 기독교 환원주의 등 종교학이 항시 유의 하는 점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진홍은 기조논문에서 “왜 함석헌인가?”를 되물으며 오늘의 종교학 담론에서 한 종교인의 평전이 차지하는 위상을 짚는다. 그에 따르면 함석헌과 종교의 넘나듦, 그리고 그 독자라는 삼각구도 내지는 이중 중첩구조는 객체화된 도식이거나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종교학이 삶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가?”, “일상 삶의 자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이 시대의 함석헌 읽기/이해하기가 그런 자리에 놓여 질 때 비로소 “함석헌 현상”은 우상화, 신화화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관성에 머물러 자기 길들이기(Self-domestication)라는 인식의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함석헌 현상이 “증언적 자리”,“살펴 알아가기”,“울을 쳐 가두려는 자리”에 길들여 지기보다, “울을 열고”,“본디 모습 좇는 자리”이기를 권한다. 함석헌은 처음부터 기독교적으로 완결된 분이 아니고 분명히 시대를 따라 성장해 간 분이고, 이 땅의 삶과 문화를 살아간, 끝이 열린 분이었다. 함석헌 담론이 어째서 함석헌을 기독교에만 귀속시키거나 완결된 귀착점으로 환원해서는 안되는지 이 글은 잘 보여준다.

이제껏 함석헌 이해를 선도적으로 이끈 김경재의 <함석헌의 종교이해>는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 함석헌의 전 생애를 통한 “종교의 벽허물기”와 물상화, 우상화, 권력화에 대한 비판을 들며 참 “삶의 현장“을 현시한다. 축적적 종교전통이 물상화라면 삶의 체험을 통한 내면적 신앙, 바로 그것은 시 쓰기와 같은 작업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함석헌의 삶과 생명의 현장성이라고 지적한다.

이 진구의 <‘새 종교’와 ‘낡은 종교’> 역시 함석헌이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기성종교와의 일치가 아닌 낡은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종교(개신교)의 신앙인이었지, 일정한 종교나 종파로서의 기독교 신앙인은 아니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여기에서 함석헌 신앙이 보여주는 삶의 현장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신재식의 <함석헌과 종교다원주의>는 함석헌의 신화화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함석헌 숭모회의 성격을 띤 단체들이며, 함석헌을 일정한 종교의 틀 속에서만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빈발하는 사정을 주시하며 함석헌의 신화를 해체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라는 용어가 함석헌을 정의하는 최적용어는 아닐지 몰라도, 이제껏 그에게 씌어놓은 고정적인 틀을 벗겨내기에는 도움이 된다. 탈향의 메타포는 또 다른 기독교로의 복귀가 아닌 더 큰, 열린 것으로의 지향[脫)/向]이라는 함석헌 이해의 개방성을 제시한다. 뒤이은 송현주와 김대식의 글은 함석헌의 종교다원주의가 내포하는 열림[脫/向]의 자세를 적시해준다. 그가 어떻게 불교를 위시한 동양사상전반을 이해했느냐 하는 “이해와 수용”의 수준이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을 찾아내는 함석헌의 기본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논문들은 이미 폐기처분 지경에 이른 혼합주의(syncreticism)적 서술과 그런 개념의 틀을 벗어나서, 끝이 열려 퍼져나가는 함석헌의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함석헌이 우리의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특히 독재와 민주화, 자본주의와 복지사회, 전통종교와 기독교의 길항관계라는 우리 현장의 중심에서 종교인으로서 중요한 메시지들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다만 지금 우리가 그를 다시 재현시킬 때 생길 수 있는 신화화, 객체화, 우상화, 환원 등등의 함정을 조심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모든 발표자들이 이런 난관들을 잘 짚어내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작업이 함석헌 한 인물로만 그쳐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우리 근대사에서 모시고 따져볼 인물들이 희소하다는 불평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특집을 계기로 선현에 대한 발자취를 다시 되짚어 보면서 우리 학문의 나아길 바를 모색하는 계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특집이외에 5편의 논문이 실렸다. 편집의도와 가이드라인이 미리 필자들에게 전달된 것은 아니지만 신통하게 3편의 논문은 이미 논의가 끝났거나 거의 폐기상태에 처한 종교학의 개념들이거나 종교현상에 대한 반성적 재음미를 시도하고 있다.

유기쁨의 <애니미즘의 생태주의>는 과거의 종교학 개념이 현대의 콘텍스트에서 어떻게 재활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학문적 개념화작업이 삶의 현장을 어떻게 배제시켰으며, 또 삶과 개념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고 상호 교호적인 관계여서 음미할수록 재현도 가능하다는 것도 보여준다. 홍지훈의 <아나뱁티즘>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논문이다. 안신의 <반·델·레우와 미르체아·엘리아데의 비교연구>도 삶의 장(場)과 학문의 한계라는 맥락에서 읽고 싶다. 유형론과 비교론이란 종교현상학적 접근은 현대 종교학의 골격과 같은 것이지만,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며 읽게 되는 글이다. 오늘날 유형론이나 비교론이라는 문화 유형적 차원의 이해가 실존적인 종교인/학자들을 어떻게 역사의식 속으로 다시 이끌 수 있는 것인지, 앞에서 언급한 삶의 현장성으로까지 이끌 계제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지니게 된다.

마지막 2편인 고병철의 <조계종의 현재와 미래>, 윤용복의 <중국 흑룡강성의 한국종교>은 자료로서의 가치가 훌륭하다. 불교의 대표종단이며 한국불교의 대들보 역을 하는 조계종단의 실제 모습을 서술한 책은 희소하다. 그런데 지금 이 논문은 간결하게 조계종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어 거의 백과사전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항목마다 견해에 따라 달라자는 문제 현안마저 제시하고 있어, 표준적인 참고서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또한 윤용복의 글 역시 이 지역의 종교 기초자료로서 좋은 참고가 된다. 일독을 권하고 싶다.

<설림>의 글은 어떤 다른 글보다 먼저 펼쳐 읽고 싶을 정도로 즐거움을 주는 글들이다. 이 난이 이미 확실한 틀을 잡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학문하면서 맛보는 양념이라고 할까? 알짜만을 뽑아낸 진국과 같은 느낌이다. 유교와 화장실이 그렇게 연결될 줄이야. 화장실 문화와 하이힐, 화장실과 향수문화를 생각하며 함께 읽을 수 있다.

<주제서평>에서는 아이들 도서 시장에서 ‘종교’라는 테마가 어떻게 소비되는지를 날렵한 터치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를 준비하는 한편으로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삶의 정수를 논하는 길이 얼마나 지난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어느덧 17회를 맞는 <<종교문화비평>>발간 소식은 우리에게 뿌듯함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같이 전해주고 있다. 많은 동학의 힘찬 날개 짓으로 학문의 신께누가 되지 않게 매회를 더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17번째 우리 동학들의 구슬땀을 세상으로 보내고자 한다.

이민용_

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minyonglee@hotmail.com

주요 논문으로 <불교학 연구의 문화배경에 대한 성찰>,<서구 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고, 역서로《성스러움의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