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호-종교개념과 종교학이 죽어야만 종교학이 산다?(장석만)
종교개념과 종교학이 죽어야만 종교학이 산다?
2013.2.12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종교연구에 전제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종교개념과 종교학이 죽어야만 새로운 종교연구의 전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여 학계 주목을 끌고 있다. 이 같은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磯前順一의 책 <<宗敎槪念あるいは宗敎學の死>> (東京大學出版會, 2012)의 내용을 서평 형식을 빌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3부, 10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에 보론인 <식민지조선과 종교개념>이 첨부되어 있다. 책 1부는 이 책의 기본적 관점이 잘 나타나있는 부분으로, 여기서 저자 이소마에는 종교개념을 둘러싼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바로 1부 제3장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만큼 저자가 이 부분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가 후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제목은 스피박의 책(Gayatri Chakravorty Spivak, Death of a Discipline. New York: Columbia, 2003.)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스피박이 서구중심적인 비교문학의 파산을 선고하고, 타자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과 지구적 사고(planetarity)에 바탕을 둔 비전을 제시한 것처럼, 이소마에도 기존 종교학의 폐기를 주장하고, 새로운 종교연구의 전망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마에는 새로운 전망의 제시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소마에는 간단하지 않은 일련의 논지를 펼치는데, 이 부분이 흥미를 끈다.
우선 그는 서구-비서구의 이항(二項)대립(對立)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한다. 종교라는 개념이 서구의 역사적 맥락에서 유래되고, 서구 중심적인 틀에서 유지되어 왔다고 해서, 종교 개념의 극복이 비서구적인 토착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대립항의 어느 쪽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되면 결국 이항대립의 틀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이소마에의 해법은 이항대립의 틀을 붕괴시키기 위해 그 틀의 틈 사이(in-betweenness)를 파고드는 것이다. 이소마에가 각 학문 분야의 경계를 유지하며 진행되는 interdisciplinary 연구대신 경계를 가로지르는 transdisciplinary 연구를 주장하고, 문화 사이의 경계선을 고정화하려는 multiculturalism을 비판하는 것도 기존이 틀에 대한 그의 교란(攪亂)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상상력의 도약”은 이처럼 기존의 틀이 흔들려서 틈이 벌어지게 될 때 비로소 생겨난다. 그 틈 사이에서 기존 분류체계(classification system)의 한계가 드러나고, 새로운 언어와 실천(practice), 그리고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분류 체제는 대단히 견고하고 탄력성이 있어서, 공격을 당해서 벌어졌던 틈도 어렵지 않게 메워버린다. 공격을 하던 쪽이 그 체제에 포섭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소마에는 그 대표적인 예로 Tomoko Masuzawa의 책 The Invention of World Religions (2005)을 든다. 이소마에는 마쓰자와가 프로테스탄티즘적인 종교 개념을 비판하면서 시작했지만, 그 비판이 철저하고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다시 그 영향권 안으로 포섭되어 버렸다고 본다. 마쓰자와가 세계종교(world religions)라는 개념의 형성을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그 배후에 프로테스탄티즘적인 종교 이해가 작용해 왔다는 것을 밝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 중심주의를 제거한 세계종교 개념을 용인함으로써 결국 세계종교라는 개념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소마에가 취하는 단호한 자세는 종교 개념과 종교학의 죽음을 주장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유산(遺産)인 종교 개념 및 그런 종교개념을 전제로 성립한 종교학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종교학자들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소마에가 단지 종교 개념과 종교학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죽음 선포는 부활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철저하게 죽는 방향이야말로, 이전 아이덴티티의 완전한 부정이야말로 비서구세계와 민중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의 관점을 인식한 새로운 언어가 나타날 수 있다...이전의 상투적인 자기 존재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고,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타자의 관점에 대응할 응답력을 지니지 못하게 되면 종교학 및 그것이 의거하는 종교 개념은 진정한 죽음, 소생하지 못할 어둠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책 2부에서 다뤄지는 주제는 일본의 종교연구이다. 이소마에는 그동안의 일본 종교연구가 서구적 종교개념을 수용하여 마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인 양 전제해왔던 내용을 비판한다. 그 주요한 전제는 종교가 사적(私的) 영역에 속한 반면, 정치는 공적(公的)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가 작동하게 되면, 종교는 당연하게 비(非)정치적인 것, 개인 내면의 신앙에 국한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 혹은 폭력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 된다. 그런 종교를 연구하는 종교학도 자연스럽게 탈(脫)정치적이고, 종교의 “밝은” 측면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소마에는 일본 종교학자들이 내면화한 이런 태도에 충격을 던진 것이 바로 1995년의 옴진리교(Aum Shinrikyo) 사건이라고 본다. 그 사건은 종교학자들에게 어쩔 수 없이 종교의 “어두운” 측면과 폭력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 것으로, 종교를 보는 자신의 관점을 다시 살피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이다.
책 3부는 신도(神道) 및 천황제를 종교개념과 연관하여 논의하는 부분이다. 1880년대에 이르러 일본에 종교와 정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이분법이 정착하게 되면서, 종교는 개인의 내면에 국한되고 그런 조건 아래에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다. 반면에 세속의 공적 영역에서는 국민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제도적 장치(裝置)가 필요해지는데, 그것이 공적 도덕(道德)이고, 그 핵심은 천황제를 통한 국민의 주체(主體)화이다. 서구적인 종교-세속의 이분법을 수용하면서도 일본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그 응집력을 내면화하는 메카니즘으로서 천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어진 종교와 도덕의 이분법적 구분선에 따라 종교학과 신도(神道)학이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게 된다. 이소마에는 신도학자가 천황제를 비판하지 못하며, 종교학자가 종교개념의 역사적 구속(拘束)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이런 구분의 기득권에 침잠(沈潛)해 있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종교개념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자는 마찬가지로 천황제도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 천황이 초월적인 존재가 된 과정과 일본국민으로서 개개인이 주체화한 과정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소마에는 천황제의 주체화 장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기 비판적 주체화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묻고 있다.
보론인 “식민지조선과 종교개념”에서 이소마에가 주장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식민 본국인 일본과 피식민지인 조선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관된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지만 그동안 국민국가적 경계선에 갇혀서 일국사(一國史)의 관점에서만 연구되어 왔기에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은 종교개념을 자발적으로 모방(mimicry)하기도 하였고, 강요 받기도 하면서 점차 그 개념을 수용하게 되며, 이렇게 수용된 종교 개념이 거꾸로 식민 본국에 건너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또한 종교 개념을 횡령(appropriation)하여 이를 통해 식민의 지배체제에 저항하고 부식(腐食)시키기도 한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의 문제를 탈정치적으로 파악하는 종교학자들에게 “식민지조선과 종교개념”이라는 주제는 좋은 교정(矯正)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식민지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폭력성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타자와의 조우에 내재된 폭력성과 그와 긴밀한 연관을 지닌 종교 개념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소마에는 이를 계기로 일본 종교학의 자폐적인 경향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단서를 기대하는 듯하다....
일본에서 종교개념이 수용되고 전개된 양상은 서구와 일본의 개념적 상호관계를 탐색하게 할 뿐 아니라, 중국 및 한국 등의 동아시아 지역과의 개념적 상호관계에 흥미로운 문제를 제공해 준다. 이소마에의 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종교 개념을 둘러싼 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들에게 많은 통찰과 생각할 점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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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磯前順一 책 <<宗敎槪念あるいは宗敎學の死>>,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2012. (Jun'ichi Isomae, The Death of the Concept of Religion and of Religious Studies, University of Tokyo Press, 2012.)에 대한 서평에서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장석만_
종교문화비평학회 회장
stonemann@daum.net
논문으로 <민족과 인종의 경계선:최남선의 자타인식>, <인권담론의 성격과 종교적 연관성>, <한국신화 담론의등장>등이 있고, 저서로 ≪종교 다시읽기≫(공저), ≪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는다≫(공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