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252호-신학의 이성과 종교학적 상상력(김영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3. 3. 13. 17:44

 

                  신학의 이성과 종교학적 상상력

안셀름의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와
조나단 스미스의 “종교 상상하기 (imagining religion)”


 

 

2013.3.5

 




신학은 신에 대한 이성적 담론입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은 그의 책 『모놀로기온 Monologion』에서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라는 기획으로 이 점을 표현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철학과 문법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철저히 논증했습니다. 그러나 자칫 딱딱한 철학적 논증처럼 보이는 안셀름의 글은 사실 자신이 평생 동안 몸담은 수도원이라는 삶의 자리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 삶의 자리는 종교학적 상상력을 만날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신학자의 눈으로 보면, 종교학은 신학의 담론을 인간학적 입장에서 재서술(re-describe)하는 이차적 담론입니다. 종교학적 글쓰기는 신학 담론의 씨줄과 날줄을 드러내는 분석적 작업을 넘어서서, 그 담론이 생성되는 삶의 자리를 드러내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종교학자가 신학자의 언어를 그 삶의 자리에 다시 위치시킬 때, 신학자의 언어는 역사의 지평 안에서 인간현상의 하나로 그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조나단 스미스는 이러한 종교학자들의 활동을 "종교 상상하기(imagining religion)"로 명명합니다. 종교 상상하기의 핵심적인 전제는 “모든 인간은 의미세계를 건설하는 독특한 창조성(creativity)을 가지고 있다”입니다. 이 창조성은 구체적인 역사적 지평을 만날 때, 언어와 행위로 발현됩니다. 종교학자는 동일한 창조성으로 그 언어와 행위의 삶의 자리를 상상하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학문적 분류체계 안에서 그것들을 종교현상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 종교 상상하기의 빛 아래에서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는 그 심층적 의미를 드러냅니다. 안셀름의 삶의 자리는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의 표층적 의미가 암시하는 철학자의 어두침침한 연구실이 아닙니다. 그는 수도사였습니다.『모놀로기온 Monologion』을 쓸 당시, 그는 이미 수도원에서 동료 수도사들과의 내밀한 우정 가운데에서 15년간의 명상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안셀름에게 명상수행은 절대자로의 여행이었으며, 친구 수도사들은 그 여행 가운데 만난 길동무들이었습니다. 이 여행에서 친구들을 자신의 자아의 일부였고, 그 삶의 여정 가운데 수도원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넘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절대자를 향하여 명상적 여행을 떠나는 수도원 안과 밖의 모든 수행자들을 바라보며, 안셀름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만나는 행복한 상상을 하였습니다.

 

종교학적 상상의 빛을 통해서 안셀름의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는 수도원의 삶과 우정 안에서 그가 발견한 명상수행의 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세상의 사물 가운데 인간의 이성이 절대자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성적 마음을 통해서 수도자는 절대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이성적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열린 길입니다. 열린 길이라는 관점에서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지금 나와 내 친구들이 가고 있는 이 길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이미 자신이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 능력을 그 본유의 능력대로만 쓸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며 나와 내 친구들과 함께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며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안의 행복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를 나직이 외치며 세상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절대자로의 여행으로 초대했습니다.

 

이 손짓은 이성으로 절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안셀름은 이성을 통한 절대자에 대한 논증은 그 실물은 보지 못한 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자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 자체는 맞지만, 그 이야기는 항상 피조물에 비친 절대자의 형상에 대한 어설픈 묘사에 그칩니다. 이런 점에서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는 절대자인 신 앞에서의 인간 능력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의 다른 이름입니다.


 

안셀름과 그의 친구들은 이러한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전 삶을 헌신해서 상상했으며 그 상상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상의 대상을 궁극적 기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상하기는 자신들의 전 삶을 지배하고 변화시켰으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행복을 누리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안셀름의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는 종교 상상하기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오직 “첫 번째 순수성(first-navet)”을 살아가는 이에게만 허락된, 절대자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는 곳, 약속의 땅을 지시합니다.


 

스미스의 “종교 상상하기(imagining religion)”에서는 수도자 안셀름의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 )”가 보여주는 약속 안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종교 상상하기(imagining religi on)”에서는 모든 현상을 인간현상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성적 상상력을 본질적으로 넘어서 있는 부분, 다시 말해 역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을 인정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괄호 칩니다. 물론 여기에 종교 상상하기의 강점, 즉, 특정 전통에 함몰되지 않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구성적 상상력의 가능성이 아무리 광활하다 할지라도 그 상상력이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혹은 모든 구성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와 무대를 제공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은 “종교 상상하기”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일까요? 안셀름의 약속의 땅을 같이 품고 종교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혹시 이 지점에서 종교 상상하기도 안셀름의 약속의 땅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안셀름의 “오직 이성으로(sola ratione)”가 스미스의 “종교 상상하기(imagining religion)”를 향하여 조용히 손을 내밀어 봅니다.


 

 

김영원_
Graduate Theological Union, Ph. D.
kyw940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