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257호-섹슈얼리티와 죽음, 불과 물(종교문화비평23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3. 7. 11. 17:43

            섹슈얼리티와 죽음, 불과 물


                                                                                                        2013.4.9

 

 


 

 

<종교문화비평> 23호 권두언


 


 

인간의 안팎에서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힘은 많다. 하지만 그 힘이 지닌 크기와 범위, 그리고 지속성의 측면에서 성적 에너지를 능가할 만한 것은 찾기 힘들다. 그 힘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면서 우리를 한편으로는 신비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끔찍한 곳으로 이끈다. 성적 에너지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도저히 이전과 같은 상태로 머무를 수 없게 되고, 초월적 힘이 작용하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런 무지막지한 힘에 사로잡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양성(兩性)으로 구분된 모든 생명체에 나타나는 것이며, 생명체가 끈질기게 유지되는 비밀의 동력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성적 에너지는 동물과 식물의 종(種)적 차원에서 작동하면서 거대한 생명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는 “펌프”의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각 개체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될 수 없는 차원에 있다. 이 맹목적인 힘 덕분에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삶을 영위하는 최초의 동력과 관성의 계기를 얻게 되고, 삶의 사이클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 사이클은 암수의 두 개체가 교접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 다음에 죽는 시스템에 속해 있다. 계주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나면 운동장에서 퇴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적 에너지는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황홀경에 빠뜨려서, 곧장 삶의 클라이맥스에 치솟게 한 다음에 낭떠러지의 외길에 홀로 남겨둔다. “섹스 후에 동물은 슬프다.”라는 말은 그런 내리막길에서 느끼는 전형적인 심사(心思)일 것이다. 하지만 이 슬픔은 그리 오래가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성적 에너지의 환상이 엄청난 힘으로 이 각성의 짧은 순간을 뒤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적 에너지의 속성을 섹슈얼리티라고 부른다면, 섹슈얼리티는 인간 삶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있다고 할 만하다. 섹슈얼리티 덕분에 인간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근원적인 동력을 얻어 삶의 질서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섹슈얼리티의 엄청난 에너지는 창조뿐만 아니라, 그 질서가 파괴되는 방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마치 음식을 데우기 위해 지핀 불이 집 전체를 태우게 되는 것과 같다. 창조와 파괴의 두 가지 측면은 동전의 앞뒷면으로 볼 수 있지만, 두 가지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파괴적 측면이 부정적으로 간주되고, 그 측면을 억압하려는 것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인다.

 

특집 <종교와 섹슈얼리티>의 첫 번째 논문 <섹슈얼리티의 성스러움>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런 일방적 관점에 대항하여 섹슈얼리티의 파괴적 측면이 과장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소돔의 120일>>에 나타난 사드 후작의 상상력은 섹슈얼리티의 한쪽 측면만이 강조된 기형적인 맥락에 반발하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성스러움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는 가운데, 섹슈얼리티에 관한 일방적 관점을 교정하고자 한다. 두 번째 논문 <‘일본교’와 섹슈얼리티>는 미시마 유키오의 사례를 통해 일본인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본교라는 “이데올로기”에서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각 개체의 속성을 삭제하는데 기여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필자에게 이런 식의 섹슈얼리티는 기존 체제의 유지를 위한 것으로, “고독한 자아들끼리 불가능한 융합을 꿈꾸는 곳에 생겨나는” 섹슈얼리티와는 다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관점은 일본의 근대사에서 체제초월적인 에로티즘의 측면이 억압되어 나타난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세 번째 논문 <사랑이 조각하는 죽음의 공간>은 서구문화에 초점을 맞추고, 섹슈얼리티와 종교가 서로 얽혀서 갈등을 벌이는 상황과 더 이상 섹슈얼리티가 종교와 연루되지 않게 된 상황을 대조하며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상황이든 섹슈얼리티는 질서의 틀을 벗어나고 그것을 불살라버리는 과도(過度)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종교적이든 근대적이든 사랑과 섹슈얼리티는 그 과도함으로 인해서 죽음의 공간에 근접해 있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논문 <“섹스 앤 더 시티”>에서 필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섹슈얼리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했다는 기존 학계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거룩한 동정과 결혼의 선함”을 신학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가 임박한 종말을 외치는 소수 종파에서 주류의 제도권 교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매력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서로 섞여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논문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은 4세기부터 7세기의 유럽에서 등장하는 남장여자 수도자가 한편으로 기독교 교회의 젠더 질서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그것을 교란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부각 시키고 있다. 여자수도자가 여성의 옷이 아니라 남성의 옷을 입는다는 것에는 이미 “불온한” 기미가 감돌아서 섹슈얼리티에 대한 긴장된 관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일반논문은 3편이다. 우선 <2012년도 종교법판례의 동향>은 종교와 관련된 작년의 판례를 개관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준 것으로, 한국에서 종교와 법의 최근 관계 양상을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 종교와 관련된 판례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글은 종교연구자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국 종교의 평화 인식과 통일 운동>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계의 통일 논의를 검토하고 있는 논문으로, 필자는 종교계의 통일 논의가 어떻게 종교인에게서 상투적으로 나타나는 “일치, 화해”의 수사학적 과잉을 극복하고 현실에서 구체화되고, 실천화될 수 있는지 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영화에 나타난 자살과 종교치유 관한 연구>는 세 편의 영화에 나타난 자살의 의미를 분석하고 종교치유의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 글은 “종교가 신자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영화 또한 관객에게 종교적 구원의 문법을 제시”할 수 있다는 필자의 굳은 “믿음”을 전제로 진행되고 있다.

 

이번 호의 성물(聖物) 기행은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그릇인 제기(祭器)이다. 필자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희생, 술 그리고 음식을 만들거나 담을 때 사용하는 그릇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제기의 특성 상, 보통 그릇과는 다르게 구별되어 취급되었다는 것, 그러나 사용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기한이 지나면 땅에 묻어 폐기되었다는 것 등이 인상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주제서평의 대상은 1935년에 간행된 말리노프스키의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이다. 트로브리안드 군도에 관한 말리노프스키의 세 번째 민족지인데, 9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우리 연구소의 유기쁨 선생이 4년 동안 번역하여 작년에 3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경의를 표한다.

 

마음가는대로 쓰는 설림(說林)은 죽음에 관한 단상이다. 마치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숲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필자가 나직하게 들려주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새 마음이 차분해지고 맑아지는 기분이다. 특집에서 섹슈얼리티의 논의로 달아올랐던 머리를 설림의 필자는 졸졸 흐르는 숲의 시냇물로 조용히 가라앉게 해준다. 저절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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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종교문화비평>23호(2013년 3월31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 입니다.


 

장석만_
종교문화비평 편집위원.옥랑문화재단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skmjang@gmail.com
최근 논문으로는 <‘종교’를 묻는 까닭과 그 질문의 역사: 그들의 물음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종교와 동물, 그 연결점의 자리>, <日本帝國時代における宗敎槪念の編成: 宗敎槪念の制度化と內面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