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273호-제9차 안동 종교문화 탐방 후기(김후련)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3. 11. 18. 17:33

 

 

                       

                       제9차 안동 종교문화 탐방 후기


 

 

2013.7.30

 

 

지난 7월 21일(일)에서 7월 22일(월)까지 1박 2일에 걸쳐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제9차 안동 종교문화 탐방이 있었다. 총인원 15명이 참가한 이번 여행에서 잊고 살았던 유교문화의 정수를 만끽했다. 7월 21일 오전 8시 40분에 사당역 부근에서 출발한 탐방단은 12시 경에 안동에 도착해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안동에서 합류한 한국국학진흥원의 김순석 선생님이 합류하셔서 오후부터 본격적인 유교문화탐방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병산서원이다. 김순석 선생님이 발표하신 자료에 의하면, 병산서원은 고려 때 안동의 풍산현에 풍악서당이 있어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에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에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이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하였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나 인근이 주택들이 들어서고 길이 나서 시끄러워지자 유림들은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개칭한다. 그 후에 임진왜란으로 병산서당이 불에 타자 다시 서당을 중건하고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그 후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임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1868(고종 5)년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47개 서원중에 하나가 되었다.

 

배룡나무를 비롯한 수목에 둘러싸인 병산서원은 뒤로는 산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앞으로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굽어보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복례문으로 들어가서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만대루가 나온다. 누각인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으로 200여 명이 동시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확 트인 공간이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 중에서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에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宣晩對)”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어서 차를 타고 하회마을로 이동하였다. 김순석 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하회마을을 둘러본 일행은 이어서 학봉 선생의 고택으로 이동하였다. 학봉 종택에서 일행은 학봉 종택의 보물들을 모셔놓은 운장각 내부를 둘러보고 난 후 안동식혜와 수박을 먹으면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이신 김종길 종손으로부터 학봉 선생과 관련된 일화를 들었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 선생은 퇴계 선생의 제자로서 퇴계도학의 적통을 이은 강직한 학자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초유문을 직접 작성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초유문이 발포되자 영남일대의 유생들이 총궐기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학봉 선생은 진주 판관 김시민을 진주 목사로 임명하고 군사를 모아 진주 사수를 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성일”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학봉 종택과 관련된 미담 중에 하나는 호남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 선생이 전장에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데리고 출전하면서, 막내인 용후(用厚)에게 어머니와 식솔을 거느리고 경상도 안동 금계의 김학봉 선생 댁을 찾아가라고 명한다. 16세 소년 고용후는 어머니와 가솔 50명을 이끌고 천리길을 걸어서 학봉 선생 댁에 와서 몸을 의탁한다. 학봉 선생의 장자 애경당 김집(金潗) 선생은 자신도 생활이 어려웠으나,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맞아들여 4년 동안 같이 살면서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10여년이 지나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을 해온 고용후는 학봉 선생 노부인과 김집을 관아로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서로 정을 나누면서 살았다.

 

또한 구한 말에서 일제시대에 생존했던 김용한(金龍煥) 지사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주손이자 서산 김흥락 선생의 장손으로 출생하였다. 김용환 지사는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봉 종가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는데, 일제 의심을 피하기 위해 노름판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 사정을 모르는 이들한테도 노름에 미쳐 종택의 전답까지 팔아치운 파락호로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가족에게까지 끝내 이를 비밀에 붙이고 작고하였으나 나중에 동지인 하중환 지사가 그의 행적을 세상에 알렸다.

 

이어서 신라 신문왕 2년(682)에 건립된 안동의 유서 깊은 사찰인 봉정사를 둘러보고 제비원 미륵불로 향하였다. 안동에서 영주, 봉화 방면으로 가는 5번 국도에 있는 미륵불은 다양한 설화를 간직한 채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낙비를 뒤로 한 채 일행은 이어서 안동 임청각으로 이동하였다.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낸 고성 이씨 이명(李)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이었으나 현재는 70여 칸이 남아 있다. 이 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던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1858~1932)의 생가이자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서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가문이다. 이상룡 선생 일가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이 집과 전답를 다 팔아치우고 위패를 땅에 묻은 후 일가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안동 임청각 관람이 끝난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후 일행은 숙소인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동하였다. 일행은 저녁 8시가 지나서 한국국학진흥원 세미나실에서 탐방주제 발표 및 토론이 있었다. 첫 번째 발표는 <현대 한국유교의 사상적 과제>라는 제목으로 박종천 선생님의 발표가 있었고, 이어서 <안동 지역의 종교문화>라는 제목으로 김순석 선생님의 발표가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다시 방에 모여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7월 22일(월)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마치고 도산서원으로 향하였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살아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 공간과 개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에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자리 잡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祀)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다.

 

도산서원 탐방을 마친 일행은 다시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돌아와 김순식 선생님의 안내로 유교문화박물관을 견학하였다. 선현의 정신을 담은 현판은 “집안을 상징하는 명가의 현판, 당호(堂號)”, “교육이념을 담고 있는 공간의 현판, 서원(書院)”,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의 현판, 누정(樓亭)”,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고 있는 현판, 재사(齋舍)“으로 나누어 일목요연에게 정리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이어서 퇴계종택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일행은 16대 종손이신 이근필 선생님께서 친필로 쓰신 서예를 선물로 받고, 마침 유두천신流頭薦新(혹은 유두차사流頭茶祀)이 있어서 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유두천신이 끝난 후 차례에 올린 음식으로 점심 대접을 받고, 탐방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번 탐방은 세월을 500년 뒤로 돌려 안동 선비문화의 향취를 만끽하면서 조선의 선비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뜻 깊은 일정이었다.

------------------------------------
* 유두 천신란 새로거둔 밀로 빚은 국수와 햇과일을 올리는 차례입니다.


 

김후련_
한국외국어대학교
hooryun@empas.com
저서로 <<일본신화와 천황제 이데올로기-신화와 역사 사이에서>>,<<타계관을 통해서 본 고대일본의 종교사상>>등이 있고, 논문으로 <일본의 태양신화와 태양숭배>,<한국전통문화의 정체성 확립과 국가브랜드 위상>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