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873호-작은 자들의 농밀한 기록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5. 3. 11. 17:11

작은 자들의 농밀한 기록

: 일제강점기 소록도 한센인의 신앙의 흔적을 찾으며

 

 

 

news letter No.873 2025/3/11

 

 

 

사회에서 추방된 자, 자신이 살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 빼앗긴 채 낯설고 험악한 격리 공간으로 병든 신체를 끌고 가야 했던 한센인의 삶은 비참함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자포자기의 삶을 살더라도 그 의지의 나약함을 탓할 수 없는 열악한 시설과 강압적인 통제가 횡행했던 섬, 한센인이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격리 공간, 그렇게 소록도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여전히 사회에 남아 있다. 그곳에 서면, “그런 곳에서 그런 몸으로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상상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시간의 중력에 빨려든다.

 

 

오래된 철제 캐비닛을 열자 나름의 분류 방식으로 정돈된 서책과 문서들이 보였다. 그리고 교회사무실 책장 맨 아래, 오랫동안 책과 시간의 무게로 뒤틀려 그동안 열지 못했던 미닫이문을 가까스로 여니 일제 강점기부터 1950-60년대까지 발간되었던 서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곰팡이와 해충, 먼지 등과 함께 어둡고 눅눅한 곳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것치고는 제법 상태가 좋았다. 이미 소록도교회에서 정리해 놓은 서책과 문서를 재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과 함께, 새로 발견한 서책들의 목록화 작업이 팀원들의 손을 한껏 분주하게 만든다. 1920년대 전후에 발간된 기독교 서적들, 1930년대의 활천, 신앙생활, 신학세계등의 잡지들, 소록도 7개 교회와 관련된 기록물과 문서, 그 틈에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낸 이돈화의 인내천요의! 각 서책들은 두꺼운 직물 외피로 감싸여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돌려볼 수 있게 처리되어 있었다. 각 교회의 회록과 교회 관련 서류철들을 펼치면 국한문 혼용체로 당시의 교회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누가 읽고, 누가 기록했을까, 그리고 무엇을 기대하고 기록한 것일까, 어느 틈에 사라진 인명(人名)은 왜일까?” 등등 상상의 날개가 이제야 조금은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만큼은 소록도 한센인을 오랫동안 투영해 왔던 비극의 렌즈가 더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종교적 삶을 치밀하게 기록해 두었던 한센인의 코나투스를 조망하려면 새 렌즈로 갈아 끼워야 한다. 소록도 한센인의 신앙 양태와 그 위에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새기던 한센인의 감정과 신체의 흔적을 찾으려면 비극이나 고통이라는 단안 렌즈로는 턱도 없다. 종교적 열정과 연대의 점착성으로 결집된 신앙공동체로서의 소록도 한센인의 생명력을 포착해 내는 쌍안 렌즈가 필요한 것이다.

 

소록도교회의 아카이브 작업은 소록도교회 구성원에 의해서 먼저 시작되었다. 100여 년의 교회 역사를 정리하고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필요성이 교회 내에서 대두되었고, 교회 구성원들이 소록도한센병박물관 직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직접 자료들을 수집하고 교회 기록물의 일부를 이기(移記)하는 작업에 나섰다. 한문 소양을 갖춘 한센인 교인 한 분이 불편한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확인하며 오그라든 손에 볼펜을 끼워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이기 작업을 해왔다. 언젠가 소록도교회 한센인의 삶을 읽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일이었다. 오래전에 그의 선배들이 남긴 기록물을 이제 그 후배가 다시 경건히 옮기고 있는 셈이다. 이는 중세 유럽의 어느 수도원에 우연히 들어온 귀중한 고전을 필사하는 수도사의 경건한 의례의 몸짓에서 엿볼 수 있는 인내를 넘어선다. 꽤나 오랜 시간을 소록도의 건축물과 공간 보존에 애써왔던 건축가 조성룡 교수의 작업을 뒤이어 올해 초 그의 제자들이 소록도교회의 아카이브 작업에 합류하면서 작업 속도에 조금은 탄력이 붙었다.

 

남은 일은 아카이브 자료의 보관과 아카이브 자료를 해석하는 일이다. 전자는 후자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다. 자료 보관의 문제가 도구와 비용이라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수준에 있다면, 텍스트의 투명함과 불투명함은 해석자의 신경을 건드리면서 인내와 자제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텍스트가 감추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도 쉽지 않지만, 해석자의 가설에 부합하는 자료를 쉽고 투명하게 내어주는 텍스트 앞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된다는 파르주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파르주는 아카이브를 알려면 먼저 아카이브에서 배운 것을 잊어야 하고, 한 번 읽어서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경고한다(아를레트 파라주, 아카이브 취향, 92-93, 2024). 그러나 그의 경고가 무색하게, 지금 나는 소록도 한센인의 100여 년 시간 속으로 경이와 상상의 힘을 빌려서 성큼성큼 발을 내디딘다. 아카이브 자료를 마주할 때마다 사방 4리의 좁은 섬곳곳에 오랜 시간 작은 자들이 새겨놓은 이야기의 농밀함과 삶의 달고 씁쓸한 향이 에스프레소 커피의 짙은 향처럼 마구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저항할 수 없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자리를 내게 허락한 모든 이에게 감사와 존경을!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논문으로 <소록도 한센인의 사회적 공간 구성과 종교적 헤게모니>, <소록도 한센인의 고통서사와 종교의 자리>, <다른 몸들과의 불안한 연결: 종교의 장애인식과 한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