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호-중국신화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중국신화에 대한 몇 가지 단상
news letter No.877 2025/4/8
중국신화에서 우(禹)는 홍수를 다스리고 세계 질서를 창출한 문화영웅으로 묘사된다. 우가 신화의 한 주인공으로 부각된 배경은 20세기 초 중국에 신화 개념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우는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성인 계보에 속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을 뿐 역사적인 실존 여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된 적은 없었다. 신화 개념이 인식의 잣대로 작용하면서 우는 역사성이 부정되었고 급기야 신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중국인들이 서구의 신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보였던 반응은 일종의 열등감이었던 것 같다. 이들이 왜 우리에게는 신화가 없을까 하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꼭 있어야만 했던 것이 없다는 유쾌하지 못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는 있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없어졌다는 답변은 이런 불편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던 좋은 대안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인문주의 혹은 합리주의가 발전하면서 신화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그러한 답변의 구체적 내용을 채우는 데 일조하였다. 신화의 역사화는 신화의 소멸을 촉진한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제시되었다.
전통시대 사서(史書)에서 우가 누락되는 일은 없었다. 우는 누구나가 본받아야 할 사표로서 그의 인품과 공덕은 빠짐없이 언급되기 마련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우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서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신 우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주요 신 가운데 하나로서 다루어진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원인은 오래전 역사화 된 신화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우에 관한 신화는 그런 작업의 한 성과였다. 우는 이제 역사학이 아니라 신화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근대 이후 중국신화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 배경을 이야기할 때 일반적으로 동원되는 논리와 내용을 약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신화의 역사화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허술한 측면이 많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이후로 인문주의나 합리주의가 등장하면서 신화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되면서 신화가 역사로 전환되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그렇게 쉽게 던질 수 있는 것일까.
당시 인문주의나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신화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담론으로 인식되었을 터인데 왜 폐기하지 않고 굳이 역사로 전환한 것일까. 신화를 역사화한 이유와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다면 중국 고대인들은 한마디로 서슴없이 역사 왜곡이나 위조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왜곡된 역사를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던 사람들은 인문주의나 합리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인가. 또한 신화가 역사화한 이래로 수많은 비밀이 은폐된 채 전승되고 있었다고 해도 전통사회 구성원 중 합리적인 누군가는 알아차렸을 법도 하건만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비밀의 덮개가 열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 신화의 역사화라는 말에 담긴 불투명함은 하나의 학술 용어가 지닌 적합성과 유용성에 대하여 늘 성찰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과문의 오류를 전제하고 말하면 신화의 역사화 자체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글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2002년 중국의 한 박물관이 홍콩의 골동품상에게서 서주시대 청동기 한 점을 구입하였다. 추후 빈공수(豳公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이 청동기는 서주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빈공수에 새겨진 명문에는 다른 청동기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문 맨 첫 부분에서 우에 관한 언급이 확인되었다. “하늘(天)은 우에게 명하여 대지를 넓히고, 산을 파내고, 강을 깊게 하였다.” 그동안 우에 관한 정보 대부분을 전승문헌에 의지하고 있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빈공수의 명문은 획기적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에 충분하였다. 전승문헌이 후대의 가필과 왜곡으로 수많은 변형을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청동기 명문은 서주 당대 우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분량이 너무 짧고 내용도 분명 제한적이다. 위의 문장을 해독하고 우를 거리낌 없이 신화적인 존재로 설정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신화에 갇힌 우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신화라는 창은 많은 것을 주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가리기도 한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상대 갑골 점복의 복조 해석에 관한 소고〉, 〈商代 토테미즘 설에 관한 비판적 접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