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레터

886호-황선명 선생 추모집 편찬에 참여하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5. 6. 10. 15:55

황선명 선생 추모집 편찬에 참여하며

 

 

news letter No.886 2025/6/10

 

 

1.

출간을 앞두고 있는 황선명 선생 추모집 편찬에 참여한 것은 대단히 뜻깊은 경험이었다. 20235월에 있었던 한국신종교학회 학술대회에 황 선생님이 패널로 참여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책장에서 너덜너덜해진 조선조 종교사회사 연구를 꺼내 학회장인 대진대학교에 갔다.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일 건강 악화로 황선명 선생님은 직접 참석하지 못했다. 급히 연결된 온라인 회의 화면에서 그분을 뵌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마도 나는 선생님과 직접 교류하며 가르침을 받지 않은 세대 가운데에서 그를 가장 활발하게 인용해 온 연구자일 것이다. 석사과정 1년차였던 2007년에 발표한 논문의 각주 1번에는 황선명 선생님의 민중운동과 종교(1979), 민중종교운동사(1980), 한국 근대 민중종교사상(공저, 1983)이 언급되어 있다. 연구를 시작할 당시 나는 스스로의 연구 대상을 민중종교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이 용어는 명백히 황선명 선생님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다. 나는 현재 민중종교라는 개념을 다소 제한적인,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박사논문의 주요 키워드였던 혁세 종교또한 기원을 따지면 그의 후천개벽과 혁세사상이라는 논문에서 온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 근대 민중종교사상에 수록된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77년 명지실업전문대학 논문집에 처음 실린 것으로 확인된다.)

 

연구 관심, 개념, 범주 등에 있어서 선생님께 받은 영향 외에, 세부적인 종교사적 논점에 대한 이견을 제시한 적도 있다. 황선명 선생님은 소강절(邵康節)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로부터 정감록과 같은 조선후기 도참비기 전통, 근대 이후의 후천개벽 사상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있으며, 그 가교 역할을 한 것이 화담 서경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나는 이에 대해 현존하는 도참비기 문헌들에서 소옹의 이론이 영향을 준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 서경덕의 역할론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 조선후기의 혁세적 예언들에서는 엘리트문화로부터 민중문화로의 하향식 전파보다는 양자의 복잡한 순환 관계가 드러난다는 점 등을 들어 반박하였다.1)

 

그런가 하면 이번 추모집 편찬에 참여하며 선생님의 저서들을 개괄하는 과정에서, 내가 다른 경로를 통해 관심을 가지게 된 주제들을 황 선생님이 이미 다룬 바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란 일도 종종 있었다. 한편으로는 선행 연구를 충실히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더 깊이 연구할 거리를 잔뜩 떠안았다는 기쁨을 느꼈다.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를 간략히 소개하려 한다.

 

2.

2020~21년 사이에 전북연구원의 지원을 받아서 19세기 말 고창 선운사 석불비결사건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연구사를 살펴보던 중에 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왜 동학은 경북에서 일어났는데 동학혁명은 전북에서 일어났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질문을 조금 더 구체화하면, 왜 한국의 근대 신종교들은 수운 최제우의 출신지이자 동학의 발상지인 경주 지역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북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활발한 지지를 얻었냐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종교적 성격의 농민봉기도, 증산, 소태산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이 지역을 거점으로 출현했다는 것은 뭔가 지역성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구한말의 지식인인 매천 황현이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남긴 다음 기록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그(호남) 사람들은 재능과 지혜가 많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잘 하여서 방술과 도참의 학문을 좋아한다. 단가(丹家)의 권극중(權克中), 의가(毉家)의 유상(柳尙), 감여가(堪輿家)의 이의신(李義新)과 박상훤(朴尙誼)과 같은 인물들이 머지 않은 과거에 있었으니 모두 명백하게 검토해 볼 수 있다. 그 외에 괘명(卦命), 풍감(風鑑), 성력(星曆), 사복(射覆), 기을(奇乙), 임둔(壬遁)의 책이 집집마다 선반에 쌓여 있어 이것을 구실로 유세를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울의 권세 있는 집안마다 머리를 숙이고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관상이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 호남 사람이 열에 일고여덟이었다.

 

호남 사람들 가운데에는 선도, 술수, 도참 등 비규범적 지식에 심취한 이들이 많아 서울에서 활동하는 술사들도 대다수가 이 지역 사람이었다는 인식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전면적으로 포섭되지 않는 이단적 중간 지식인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그것이 이 지역에서 근대 신종교가 등장해 문화적 지지를 받게 된 토양이라는 것이다. 전북 지역의 향토사 연구에서 독특한 것은 위와 같은 지역성을 호남 일반이 아니라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대략 전라북도에 해당하는 노령 이북의 것으로 다루는 경향이다. 보천교 연구자인 안후상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전형적이다.

 

노령 이남과는 달리 이북은 잡기와 유속이 유행하였다. 판소리 가락이 유행하고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진묵의 설화가 넘쳐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손화중이나 김개남 같은 낭만적 혁명가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일부(金一夫)나 강증산(姜甑山) 같은 종교적 천재를 잉태하였다. (…) 사족이 아닌 이들이 사족의 역할이 미미한 환경 속에서 탐닉한 건 도학(道學)보다는 잡술이나 좌도였던 것이다. 천문지리와 병서, 참서, 상수역학 등은 사족들이 금기시하는 것들이나 노령 이북에서는 유행하였다.2)

 

황선명의 저작들에서 같은 문제는 주로 2000년대 초의 논고들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는 한국의 종교문화에는 지역적인 차이가 있으며 관북, 관서, 기호, 영남, 호남으로 문화권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좀 더 세부적으로 영남은 안동, 경주 일대에 해당하는 이른바 추로지향(鄒魯之鄕)’과 서부 경남 지역으로, 호남은 노령을 경계로 전북과 전남으로 나뉜다. 이 구분에서 특히 대조되는 것은 경북과 전북이다. 양자는 규범 지향 문화와 서민 지향 문화, 정통 도학과 술수학, ‘장보(章甫)적 의식유학(幼學)적 세계관등으로 대비된다.3)

 

이런 문화적 특질들이 전북 지역에서 신종교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는 설명 자체는 앞서 언급한 향토사 분야의 인식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황선명의 저술에서 독특한 것은 그런 문화적 형질이 나타나게 된 사회사적 맥락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서원 등을 중심으로 재지 사족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경북 지역에서는 식자층에게 비규범적인 잡술(雜術), 좌도(左道)를 통제하는 교화 주체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었던 반면, 서원과 유림의 지역 장악력이 약했던 전북 지역에서는 그와 같은 문화적 지배력이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비록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지나치게 오래된 조선후기사 연구 성과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역별 사례 연구의 뒷받침이 약하다는 한계가 있으나,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특정 집단이나 공간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문화적 성향을 민족성이나 지역성의 본질적인 차이로 치부하는 경향에 비하면 훨씬 진일보한 견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문화적 조건이 그런 성향을 만드는지에 대한 주장은 자료를 통한 검증과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에 훌륭한 종교사적 이론이 될 수 있다. 학자에 대한 추모는 존경과 추억을 넘어 그가 남긴 학술적 주장을 재검토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달성된다. 선생님의 후기 저작에서 제안된 한국의 지역적 종교문화에 대한 이론을 정교화하는 일 또한 그런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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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선명, 〈後天開闢과 鄭鑑錄〉, 《한국종교》 23, 1998; 한승훈, 〈개벽(開闢)과 개벽(改闢) : 조선후기 묵시종말적 개벽 개념의 18세기적 기원〉, 《종교와 문화》 34.

2) 안후상, 〈19세기 노령 이북의 좌도(左道)와 동학·보천교〉, 《19세기 사상의 거처》, 기역, 2013, 14-15.

3) 황선명, 〈신종교 발생배경으로서의 호남지방 서민문화〉, 《신종교연구》 9, 2003; 〈한국 신종교의 특질에 관한 일 고찰〉, 《신종교연구》 13, 2005.

 

 

 

 

 

한승훈_

한국학중앙연구원

근래 발표한 글로 무당이즘, 점복, 의례: 김효경 무속 연구의 주제들, 남만상인, 요술사, 반역자로서의 야소종문: 임수간의 해외기문에서의 일본 그리스도교 서술, 17세기 함경도의 술유 주비: 조선후기 유랑지식인의 일례, 왕의 수명을 줄여라: 반역 사건으로 보는 조선의 이면(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