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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9.5.26



그날 저는 어떤 글을 쓰고 있었는데, 집에서 인터넷을 켜보라는 전화를 받고 급하게 클릭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컴퓨터가 다운이 되어버렸습니다. 깜깜했습니다.

나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정치인이었고, 또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에 겹쳐 한 인간의 생애, 아니, 그의 성장사가 그려졌습니다. 어떤 정치인에게도 별로 가지지 않았던 이런 눈길을 왜 저는 그의 재임 내내 그를 이해하기 위한 시선 안에 담고 있었는지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서거 소식을 들으면서 그러한 제 눈길은 그의 모든 것을 뒤덮었습니다.

저는 그를 잘 모릅니다.

그를 아는 제 인식은 이른바 ‘소통매체’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신문이든, TV를 포함한 방송이든, 인터넷이든, 책이든, 소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직접 겪은 것은 없습니다. 현대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적인 만남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모두를 매개를 통해 만나는데, 오늘 우리 인식의 바탕은 절대적으로 그러하다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직접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제가 잘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라기보다 상황적인 문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제가 내린 그에 대한 판단은 ‘그는 소박한, 또는 순수한 아이디어리스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믿건 데, 옳고 그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의 판단이 상당히 옳다는 공감을 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그른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좇아 그것을 세워야 한다는 실천적 명제가 뚜렷했습니다. 저는 이에도 동의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일이 정치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자리, 힘의 정점에 그는 이른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꿈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의 성장사와 그의 힘의 현실성을 겹쳐 놓으면서 그를 주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스림’은 이제까지 한국 정치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정치의 펼침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이디어리스트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습니다. 달려갔다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식과 판단과 실천이 잘못되었다고 하는데서 말미암는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제 불안은 그가 스스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정치는 리얼리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리얼리즘 속에서 아이디얼 한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 정치이지 아이디얼리즘을 리얼리티 안에 과하여 이를 구현하는 것이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인식이 그릇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공부한 종교사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평화는 실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을 판단하는 준거로만 설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는, 종교사가 품고 있는 일연의 내러티브에 의하면, 태초에 있든가 종말에만 있습니다. 현실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지향해야 할 것이고, 그것을 준거로 하여 지금 여기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지 현실에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실천하려는 정치권력’이란 그렇게 서술되는 래토릭은 있어도 실제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발언은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은 정치적인 힘을 지닌 자들의 발언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발언이었습니다. 리얼리스트의 몫이 아니라 아이디어리스트의 몫이었습니다. 리얼리스트의 평화에 관한 발언은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디어리스트가 정치를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 그 정치는 그 아이디어리스트의 발언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정치에서 그 정치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저리게 목도합니다. 정치는 제대로 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리얼리스트의 정치에서는 이상에 대한 배신보다 이상에 대한 기대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최악의 성직자가 리얼리스트이듯 최악의 정치인은 아이디어리스트입니다. 이를테면 예언자의 질책과 저주를 받지 않은 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이 된 예언자도 없었습니다. 예언자에 대한 기대와 왕에 대한 기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인이기 보다 성직자 같다는 느낌은 제게서 꽤 오래 이어졌었습니다. 아슬아슬한 계기들을 겪으면서 그가 정치판에 있지 말고 종교 판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정치인이면서 실은 종교인다운 캐릭터로 인상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도 그렇게 종교적인 것이었고, 그의 정치적 힘의 구조도 사뭇 그러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러한 모습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의 죽음은 온갖 종교적 정치적 함축을 다 담은 순수한 아이디어리스트의 ‘순교’와 거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야말로 한가한 사색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아이디어리스트인 한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를 비극적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 정치는, 그의 죽음, 그것도 스스로 택한 외롭고 처절한 죽음을 통해, 순수한 아이디어리즘을 실현해보려는 정치실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리 구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는 가슴을 에는 아쉬움을 지금 여기 우리로 하여금 지니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자칫 그것은 우리로부터 정치적 상상력을 고갈 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종교적 상상력의 종언과도 다르지 않다 해도 좋을 듯합니다.

얼마나 긴 역사가 기술되어야 그의 성장사를 간과해도 아무 일없이 그의 ‘치적’이 일컬어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더 살아야 철저하게 이 사건을 역사화 하여 인식의 객체로 놓고 기술하고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기억되고 전승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화의 범주에 든 사건들만이 내러티브를 통해 전승됩니다. 어쩌면 ‘노무현’은 기술되고 설명되고 해석되기보다 신화적 범주 안에서 내러티브로 그 이어짐을 아주 오래 동안 잃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삼가 고인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정진홍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mute93@hanmail.net
주요 저서로 <<종교문화의논리>>,<<경험과기억-종교문화의 틈읽기>>,<<열림과닫힘-인문학적 상상을통한 종교문화읽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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