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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82호-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 8. 24. 16:27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2015.9.1

 

 

불교도 드디어 내셔널리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불교가 보편 논리를 지니고 있는 것과 동시에 각 나라마다 민족적 특수성을 가진 종교로 이해하는데 큰 저항감이 없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의 원효와 고려의 지눌의 빛나는 업적을 통해 불교가 보편적 진리체계이면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라는 점을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적 위기 때마다 불교는 종교이기에 머물지 않고 ‘호국’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던 역사적 경험이 있기에 불교와 내셔널리즘은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불교가 스스로 내셔널리즘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다소 ‘의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왜 갑자기 내셔널리즘이었을까】

 

《불교평론》(계간) 창간 16년을 맞아 지난 8월28일(금요일) 조계사 불교역사문화회관에서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개최했다(《불교평론》 통권 63호, 2015.9.1). 불교 내셔널리즘의 전개과정의 문제를 정리한 논문에 이어, 한국·중국·일본·티베트·동남아 등에서 나타난 불교와 내셔널리즘과의 관계를 조망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특히 마지막에 이슬람의 정교일치(이희수)를 다룬 논문에 이어 〈내셔널리즘은 진리와 화(和)의 적이다〉(허우성)라는 강한 주장이 담긴 논문으로 마무리 되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불교의 ‘보편성’이 민족 또는 국가라는 ‘특수성’과 조우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모색해 보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한국 지식사회에서 내셔널리즘을 둘러싼 담론이 이미 오래전에 휩쓸고 지나간 점을 감안하면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미 한국 지식사회에서는 80년대 말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탈국가주의 · 탈민족주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으며, 이 사조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억압하는 민족적 · 국가적 폭력을 배제하는 것이 역사적 진보의 새로운 지평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인문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아가 이 같은 탈민족주의 · 탈국가주의 관점은 역사학의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보다 심각한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즉 일제 식민지 시기 해석과 관련하여, 지배-수탈의 맥락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민족적, 국가적 관점에 갇혀 있는 것이며 이를 벗어난 보편사적 관점을 갖기를 주장했다. 물론 이런 탈민족, 탈국가의 관점은 국가 기구를 동원해 지배와 침략을 감행한 일본에서는 진보적 담론의 의미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탈과 피지배의 처지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경우, 이와 같은 탈민족, 탈국가의 관점은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친일에 또 다른 면죄부를 부여하는 일이어서 지식사회에서 쉽게 동의 받을 수 없었다.


 

 

이런 지점에서 보면 왜 불교에서 갑자기 내셔널리즘이 논의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불교평론》이 내셔널리즘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심포지엄을 열기까지 해야 할 심각한 문제의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혹시 최근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병역거부’가 작은 동인이 되었을까? 나아가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문명충돌과 그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가적 폭력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들 모두 불교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지금의 문제만도 아니고 불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논의를 위한 장치 필요】

 

하나의 담론을 전개할 때 효율적 논의를 위해 크게 두 가지 장치가 필요하다. 하나는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나 사례를 명확히 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개념적 장치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장치는 서로 별개의 것이라기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이날 다룬 소재는 매우 포괄적이었다. 지역적으로 한·중·일·티베트·동남아시아의 불교 뿐만 아니라 간디·이슬람·이순신·사명당의 내셔널리즘까지 깊이 있고도 폭넓게 분석을 시도했다. 하지만 반대로 지역과 인물이 다양했던 만큼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 자체의 의미에 대해 일정한 합의를 끌어내기 어려웠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국의 ‘호국불교’가 국가의 하부구조로 편입되었던 일본의 불교와 같은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같은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역사적 배경과 경험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침략적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가 다른 만큼 동일한 하나의 민족주의로 말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이번 심포지엄에서도 내셔널리즘의 함의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런 결과는 물론 이날 지적된 것처럼 ‘불교와 내셔널리즘’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심포지엄의 사례동기를 명확히 하고 개념적 장치를 좀 더 정교하게 마련하면 어느 정도 피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가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고 부딪혀야 하는 것은 불교가 우리 시대의 문제해결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본질적 문제이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호국불교’가 논의의 쟁점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의 경우처럼 불교와 국가의 관계 갈등의 문제를 첨예하게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세계에 난무하는 폭력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로만 포착되지 않는 인간 사회의 보다 깊은 심연(深淵)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불교에 던져진 보다 큰 질문】


 

 

꼭 종교라는 이름으로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쟁에서 살육당하는 여성과 아동들에게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호사스런 개념일지도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발생한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과 생존투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분신 등이 불교의 이름으로 설명되고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이 밥 먹여주나? 중국이 밥 먹여주지!” 라고 말하는 티베트인에게 불교왕국은 꼭 지켜야 할 가치인가?

이런 커다란 질문이 정리되고 나서 불교와 폭력의 문제는 의미 있게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승군 같이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적 폭력’이나 티베트 자치를 위한 승려의 분신으로 표현되는 ‘자기에 대한 폭력’도 ‘불교가 오늘날 현대사회의 문제해결에 어떤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큰 물음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현대사회의 종교상황을 ‘카페테리아 다원주의’의 시대라고 부른다. 종교는 하나의 기호식품으로서 개인의 취향에 따라 종교마켓에서 구매하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속한 혈연, 지연의 공동체에 의해 종교가 운명적으로 주어지던 시대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교를, 혹은 종교를 우리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꼭 선택해야 할 필수품으로 생각해야 할 동인은 무엇일까?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떠오른 질문이다.

 

 

 


송현주_
순천향대학교 교수
songcloud@naver.com
논문으로 <서구 근대불교학의 출현과‘부디즘(Buddhism)’의 창안>,<한용운의 불교·종교담론에 나타난 근대사상의 수용과 재구성>,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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