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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뿌연 먼지 같은 불안을 걷어내려면
2016.5.10
막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정결과 불결의 선명한 이분법에 따라 행동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누구든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분무식 항균제를 온몸에 뿌려댔다. 아이가 더러운 물건과 접촉이라도 하면 바로 씻기고 그 물건을 치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아이에게 적합한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습기를 새로 구입했고, 가습기의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처럼 살균제를 첨가해서 사용했다. 언론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는 1997년 처음 출시된 이후 한 해에 약 60만 개, 20억 원 정도가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에 원인불명의 폐 손상 사망사고가 발생하면서 가습기 살균제의 유독성이 알려졌는데,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221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 중 92명이 사망했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은 영유아, 임산부, 노인 등이라고 한다.
불결하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는 속성은 하나의 본능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러한 본능에 따른 판단과 행위를 교란하고 오도하여, 결과적으로 질병과 상실의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에 누구든지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자신의 글에서 현대사회의 불안을 조성하는 요인 중의 하나로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든다. 도구적 이성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효율적인 운영과 최대의 효과를 산정하는 합리성인데, 그것이 오늘날 삶의 곳곳에서 하나의 척도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은 비용-소득 분석의 형식에 따라 생명의 본래적 가치와 존엄성보다는 금전의 평가를 우위에 두며, 다양한 사회적 도구와 장치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기계적·기술적 해결책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만든다.
식기 세정제를 비롯해서 온갖 종류의 살균제를 사용하는 것은 편리함을 찾는 우리의 이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삶의 환경을 조성하는 사회 구조와 함께 사물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기계적·기술적 해결책을 맹신하도록 유도하는 도구적 장치들에 우리 자신이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 아감벤은 미셸 푸코의 ‘장치’(dispositif) 개념을 일반화해서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장치로 규정한 바 있다.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자들은 이러한 장치 담론의 활발한 생산자로서 활동한다. 예컨대 4대강 개발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많은 전문가들이 온갖 수치를 들이대며 홍수와 가뭄의 방지, 농업용수의 원활한 공급, 수질 개선 등을 주장했지만,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금전적 평가, 곧 가시적인 경제적 효과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 걸음 나아가 그러한 전문가의 주장이 과연 공익성에 입각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예컨대 한 대학교수가 가습기 살균제 업체에게 유리한 실험보고서를 작성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례에서 짐작되듯이, 전문가의 지식은 개인의 경제적 회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곰곰이 따져볼 점은,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합리적 효율성의 세계에서 수단과 목적은 끝없는 순환 고리를 이루며 무의미성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사실이다. 목적들은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되다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환되기 십상이고, 따라서 애초에 어떤 목적을 위해 취했던 행위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의미한 행위가 반복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도구적 장치들의 포획에서 벗어나는 길 중의 하나는 경제적 가치보다는 관계적 가치에 행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행위가 경제적 효율성에 입각한 것인가를 따지기에 앞서 사물과 인간의 본성과 타자 생명체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해보는 관계적 가치는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래된 지혜이다. 여기서 방점은 종교의 ‘오래된 지혜’에 있지 종교에 대한 참여에 있지 않다. 그 오래된 지혜는 오늘날의 종교에서도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있다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기 스스로 오래된 지혜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종교적 인간의 출현을 목도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덧붙여, 막내 아이가 가습기 살균제의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존재가 곰팡이였다는 점은 참 역설적이다.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의 맨 끝에 있어서 방의 한쪽 벽은 바깥과 맞닿아 있었는데, 집 안과 밖의 온도차로 그 벽에 습기가 맺히면서 가구 뒷면에서부터 곰팡이가 무성히도 피어올랐던 것이다. 덕분에 가습기와 가습기 살균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대신에 한동안 곰팡이 제거제를 열심히 뿌려대는 수선을 떨기는 했지만.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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