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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496호-정복사 묘비들의 행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7.11.14 19:13

 

                               정복사 묘비들의 행방


 

 

 

    news  letter No.496 2017/11/14

 

 

 


       지난 8월 초순 북경에 다녀왔다. 학술행사에 참석하러 방문한 것이었다. 북경에 가면 꼭 들러보겠다고 마음먹은 곳이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유럽 선교사들이 묻힌 묘지였다. 학술행사를 주관하는 교수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고맙게도 북경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오현석 군이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안내해 주었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곳은 북경 동물원 뒤에 있는 북경 석각예술박물관(石刻藝術博物館)이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북경시 해정구(海淀區) 오탑사촌(五塔寺村) 24호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18세기와 19세기 북경에서 활동한 유럽인 선교사들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북경에 있었던 유럽인 선교사 묘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책란(柵欄) 묘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복사(正福寺) 묘지이다. 책란 묘지는 1610년 마테오 리치가 사망한 후에 청나라 황실에서 묘지로 쓰도록 하사한 곳이다. 마테오 리치의 무덤이 조성된 이후에 아담 샬 폰 벨(Adam Schall von Bell),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등을 위시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의 무덤이 이곳에 세워졌다.


       책란 묘지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북경시 서성구(西城區) 차공장대가(車公庄大街) 6호에 있는데, 북경시 행정학원이 그 자리에 들어서있다. 그래서 행정학원의 후원을 찾아가야만 선교사들의 무덤과 여러 묘비들을 만날 수 있다. 묘역 전체를 담으로 둘러싸서 출입을 통제한다. 쇠창살과 담장 너머로만 무덤과 묘비를 확인할 수 있다. 묘비는 대략 63개 정도 남아 있다.


       한편 1700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게 되자 별도의 묘지를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1732년 청나라 황실은 정복사라는 절이 있던 곳을 새로운 묘지로 하사하였다. 이런 연유로 정복사 묘지에는 주로 18세기 이후에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묻히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예수회 소속 35명, 라자리스트라 불리는 선교수도회 소속 36명 등 71명의 프랑스 선교사 무덤이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정복사 묘지는 두 차례에 훼손되었다. 먼저 1900년 의화단 사건 당시에 대거 파괴되었다. 1917년에 다시 복구되었지만 묘지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천주당이 세워지면서 신부나 신학생의 임시 휴양소로 사용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종교 시설물들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자 정복사 묘지도 파괴되었다. 게다가 1969년부터 1971년 사이에 중국 공산당 당국은 전쟁이나 흉년을 미리 준비하자는 구호 아래에 방공호 시설을 건설하였다. 이 때 정복사 묘지의 비석들은 북경 시내 방공호를 짓는 건축 자재로 동원되었다. 이 비석들은 1990년대 초에 어느 중학교 체육관을 보수하다가 발견되었다. 그러자 북경시 문물국(文物局)에서는 이 비석들을 중국의 정치, 외교, 문화 방면의 중요자료로 지정하고 북경시에 운영하는 석각예술박물관으로 옮겨서 보존하게 되었다.


       출입을 통제하는 책란 묘지와는 달리 북경 석각예술박물관은 입장권을 구입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박물관 중앙에 마련된 야외 전시장에 도착하니 유럽 선교사 묘비들이 6개씩 6줄로 세워져 있었다. 제2열에는 묘비가 4개뿐이어서 묘비들을 다 합치니 34개였다. 그 중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제4열의 네 번째 묘비였다. 그 묘비의 주인공은 예수회 선교사 방타봉(Ventavon)이다.


      방타봉은 그라몽(Grammont) 등과 함께 북경의 북당 천주당을 지키고 있다가 조선에서 온 이승훈(李承薰)이라는 청년을 직접 만났다. 선교사들은 이승훈에게 천주교에 관한 책을 선물하였고 또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결국 이승훈은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방타봉은 그라몽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줄 때에도 옆에 있었으며, 조선에서 온 유학자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편지에 적어서 유럽에 알렸다.


      석각예술박물관 선교사 묘비 구역에는 방타봉 묘비 외에도 초기 한국 천주교인들이 탐독하였던 천주교 서적들을 간행한 선교사들의 묘비도 여럿 남아 있었다. 요즘 천주교 성경이 동아시아에서 한문과 한글로 번역되는 경로를 연구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제5열의 네 번째 묘비가 선뜻 눈에 들어왔다. 《성경광익(聖經廣益)》을 쓴 드 마이야(de Mailla)의 묘비였다. 내가 다루는 문헌들의 저자가 묻힌 곳을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묘비라도 손으로 만져보고 있자니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묘비들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찍고, 공책에 평면도를 그려서 묘비의 위치와 이름을 적어 넣었다. 한여름 북경의 뙤약볕 아래서 팥죽 같은 땀을 흘리자니 꼭 이래야 하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헌을 뒤지건 현장을 방문하건 연구를 위한 기초 조사는 항상 이렇게 힘들다. 그러다보니 약속된 시간이 다 지나갔다. 이제 학술회의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택시를 타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뜬금없는 상상을 하였다. 여건이 주어지면 《성경직해(聖經直解)》를 지은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s)의 묘비도 찾아볼까? 이러다가 중국 천주교 사적지 탐방 연재물이라도 써야 하는 건 아닐지? 2017년 8월 6일 일요일 오후 북경의 여름은 그렇게 내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논문으로 <세계 교회의 흐름과 교계제도의 설정: 동아시아 선교 정책의 변화를 중심으로>, <19세기 전후 북경 교회의 상황에 관한 소고>,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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