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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와 우 바깥에 존재하는 동아시아의 미래
: ≪일본 내셔널리즘의 사상사≫(조관자, 서울대출판문화원, 2018)를 말하다
news letter No.556 2019/1/8
한국 언론에서는 현대일본사회의 변화를 ‘좌파의 몰락’과 ‘우경화’로 비판해왔으며, 학계에서는 ‘미국-일본-아시아’를 잇는 일본의 지정학적 사상지형을 주로 ‘친미-보수-우익-개헌’과 ‘반미-진보-좌익-호헌’의 정치적 대립 구도 위에서 ‘탈아입구’(대미종속-미일동맹)와 ‘반미입아’(대미자립-아시아 연대)의 전략이 길항하는 모습으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우의 대립구도에 입각한 비판과 일본 인식은 좌파적 패러다임에 고착된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산물로서 일본의 실제와 맞지 않는 단선적이고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
동아시아에서 한중일의 내셔널리즘과 미중의 패권주의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 한일간 해묵은 인식 차이의 심연을 넘어서서 인류사회의 미래 전망과 함께 사태를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길은 없을까? 저자는 이런 화두를 던지면서 “내셔널리즘이 충돌하고 있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지역질서를 향한 사상과제 찾기”가 본서의 목적이라고 밝히는 한편, 한국의 지성에 대해 오랜 동안 우리의 일본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강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자장에서 벗어나기”를, 그리고 일본의 지성에 대해서는 “저항민족주의와 일본적 이로니의 극복”을 구체적인 사상과제로 제시한다. 주지하다시피 ‘강좌파’란 ≪일본자본주의발달사 강좌≫(1932년) 집필에 참여한 일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지칭한다. 또한 ‘저항민족주의’란 서구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속에서 근대적 세계체제에 편입된 아시아에 공통적인 내셔널리즘 형태를 가리키며, ‘일본적 이로니’란 1935년에 결성된 ‘일본낭만파’ 문인그룹의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가 독일낭만파의 미학적 개념인 ‘이로니’(Ironie)를 끌어들여 ‘모순과 역설의 반어법적 형식’으로 파악한 일본적 미의식과 역사의식을 관통하는 서사적 특징을 뜻한다.
본서의 사상과제 즉 강좌파 마르크스주의, 저항민족주의, 일본적 이로니에서 벗어나기 위한 서술방법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전시-전후체제’의 맥락과 ‘좌우합작’의 관점은 매우 독특하고 신선하다. 이때 ‘전시-전후체제’란 학계에서 통용되어 온 ‘전후체제’에 ‘전시-’를 삽입하여 1945년 패전 이후뿐만 아니라 1850년대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기의 내전에서부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시’ 및 ‘전후’까지도 포함하여 일본 내셔널리즘의 전체상을 유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설정된 거시적 분류체계이며, ‘좌우합작’이란 일본 내셔널리즘 사상사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어온 좌우 양익의 현상적 대립과 배제관계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서 좌우가 교착하고 착종하면서 벌어지는 상호 포섭과 혼융의 결과 및 실질적인 협력관계까지를 포착한 복합적인 이념형적 개념이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한 본문의 8개 장은 ‘전시-전후체제’의 맥락과 ‘좌우합작’의 관점에 있어 유기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 먼저 전반부(1장~4장)에서는 민권과 국권이 청일전쟁을 계기로 합작을 이룬 과정, <공산당선언>을 일역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사회주의 국체론, 기타 잇키(北一輝)의 <일본개조법안대강>과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의 쇼와유신론 및 최종전쟁론으로 대표되는 국가개조운동,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미키 기요시(三木淸) 등의 대동합방・동아협동체・대동아공영권・‘근대의 초극’ 담론을 비롯한 다양한 아시아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좌우합작의 흔적들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나아가 전후 일본에서의 탈제국과 탈식민의 사상과제를 다루는 후반부(5장~8장)에서는 주로 민주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상관성을 둘러싸고 전후 일본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인민혁명과 동아시아 인민연대, 민족통일전선과 민중적 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반미아시아주의와 같은 새로운 좌우 이념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공존하는 사상의 장으로 묘사한다. 거기서는 1960년대 신좌익(학생운동세대)과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사건에 영향받아 생겨난 1970년대 신우익처럼 좌우로 대립한 세력들이 내셔널리즘 특히 반미민족주의 전선에서 서로 모방하고 융합하는 관계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버전으로 반복되어 출현한다. 가령 전후 좌익의 반미민족운동에서 전전 우익의 논리가 발견되듯이, 역사수정주의자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화를 보고 자란 극우적인 넷우익 세대나 <재특회> 등의 논리와 행동에서 냉전기 좌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는가 하면,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라든가 미야다이 신지(宮台真司) 또는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같은 평론가들은 과거의 좌우파 진영을 자유롭게 월경하면서 대중매체를 통한 서브컬처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좌・우익의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저자가 우리의 일본 인식에 있어 강좌파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8개 장은 각각 독자적인 논지를 지니면서도 크게 볼 때 좌우합작 사례의 변주곡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좌우합작의 사상사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로 전술한 ‘저항민족주의’와 ‘이로니’를 들고 있다. 저항민족주의가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취해진 용어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원래 전전 강좌파의 맥락이 중심이었는데 전후에 신좌익과 신우익의 옷을 입고 등장했다가 다시 2천년대에 ‘반미보수’와 ‘민족파 우익’으로 포장되어 부활한 개념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이로니 개념의 확장은 매우 명료하다. 전전 일본낭만파에서 비롯된 이로니는 전후에 하시카와 분조(橋川文三)의 우익 재평가 과정에서 좌익의 혁명사상과 연결되는 등, 우익 사상의 역사화 담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사족이 될지 모르겠으나, 이 중 이로니와 관련하여 좀 더 부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본서는 필자에게 현대일본의 사상지형을 이해하고자 할 때 유신기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1930년대 일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책이다. 과연 1930년대는 일본낭만파와 강좌파 뿐만 아니라 중일전쟁기의 동아협동체론을 비롯한 다형적인 아시아주의와 국가개조 담론들이 등장하면서 혁명적 낭만성과 이로니가 대로를 활보한 사상적인 전국시대였다. 본서는 그러한 일본적 이로니의 중요성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둘째, ‘아름다운 일본’(가와바타 야스나리)과 ‘애매한 일본’(오에 겐자부로) 사이의 모순을 메워주는 것이 이로니이다. 그런데 모순을 넘어서려 하지만 언제나 모순 그 자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 그 이로니야말로 다름 아닌 좌우합작의 밑그림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우합작은 ‘분열증적 일본’(가라타니 고진)의 기표이며, 일본의 내셔널리즘 사상사는 정신분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어쨌든 저자는 이상과 같은 도전적인 사상과제 실현을 위해 새로운 사유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과감하게 역설하면서 그것을 대위법적 사유, 고고학적 사유, 혼종성의 사유, 4차원의 사유 등과 같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 좌우의 이분법적 사유를 뛰어넘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예민한 정치적 촉각과 풍부한 문학적・미적 감수성 및 일종의 종교적 상상력까지 포괄하는 저자의 글쓰기를 통해 탄탄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그런 만큼 종장에서 “동아시아인들이 기아, 빈곤, 난민, 테러 등 인류보편의 사상과제 해결에 앞장서기”를 동아시아의 궁극적인 사상과제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는 결코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미래가 한일간의 대립 극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제언, 혹은 한일의 좌우 어느 쪽에도 설 수 없었던 노마드의 미술가 이우환(李禹煥)의 <관계항>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의 윤리적 당위성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이우환이 도달한 ‘여백의 미학’이 옆으로 비껴난듯한 느낌도 든다.
“사상사만이 유일한 역사”(콜링우드)라는 말에 동의하든 않든, 사상사가 문학, 철학, 미학, 종교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정치, 법률, 과학까지도 포괄한다는 점은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장점일 것이다. 문제는 사상사가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있다. 오늘날 한일관계의 질곡 안에서 어떤 사상이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저자의 선택은 바로 천의 얼굴을 가진 내셔널리즘 사상이었다.
* 이 글은 2018년 12월 24일자 <교수신문>에 실린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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