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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560호-《홍루몽》을 읽다 맞이한 설날의 잡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9. 2. 5. 09:37
                   《홍루몽》을 읽다 맞이한 설날의 잡념



 

 

            news  letter No.560 2019/2/5      


 

   
     
      요즈음 설을 맞이하는 각 집안의 풍습을 들여다보면 매우 다양한 정경이 펼쳐지는 것 같다. 나만 해도 어릴 적부터 설은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는 날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만도 않고 세대마다 가정마다 이날을 보내는 방식도 날로 다변화 되고 있다. 아무래도 조상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던 전통시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설의 의미나 분위기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청나라 때 조설근과 고악이 쓴 《홍루몽》을 읽다보면 설을 쇠는 당시의 생활상이 잠깐 드러나는 데 흥미로운 장면이 있어서 소개한다.

      이 소설 제53회를 보면 섣달이 되자 온 집안이 설날 차례 준비에 돌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집안은 개국 공신의 자손으로서 조상대대로 국가의 봉록을 받고 있는 귀족 가문이다. 설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 집 종손은 종실 사당의 문을 열어 청소한 다음 신주를 모시고, 제기를 준비한다. 게다가 안채 큰 방을 청소한 후 조상들의 영정을 걸어놓는다. 제사는 섣달그믐과 설 당일에 걸쳐서 두 차례 진행된다. 소설에서는 섣달그믐 제사를 자세히 묘사한 나머지 설날 제사는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간다. 아마도 양 이틀간의 제사가 동일한 방식으로 거행되지 않았을까 추측될 따름이다.

     그믐제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제사 진행 과정이 이원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사는 먼저 사당에서 거행된 후 자리를 내당으로 옮겨서 진행된다. 조상의 신주가 모셔진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는 남성이 중심이 된다. 사당 제사의 제주는 이 집안의 종손이 담당하고 그밖에 술을 올리는 일이나 향을 받드는 일이나 모두 남성이 담당한다. 영정이 모셔진 내당은 여성 중심의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사당 제사가 끝난 후 이곳으로 이동한 일동은 자리 배치부터 남녀 간 차이를 드러낸다. 여성들은 내당의 난간 안쪽에 들어가 있는 반면 남성들은 바깥쪽에 도열한다. 제물을 전달할 소수의 남성만이 안쪽에 배치된다. 제상에 제물을 올려놓는 일은 이 집안의 가장 어른인 여성이 담당한다. 가모로 불리는 이 여성은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정하다. 내당 제사는 가모가 제주가 되어 거행된다.

    소설 속의 한 장면이라서 당시 중국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지는 별도의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조선시대와 비교해보면 같은 동아시아권이라 해도 제사 방식에 많은 차이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조상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애착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동아시아 질서를 구성하는 공동의 원리로서 작용하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 고대 청동기 표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산 자들이 죽은 조상과 연대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하기 위하여 얼마나 세심히 고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대부분 제사 그릇의 용도로 제작된 청동기 표면에는 조상들의 미덕과 공적, 명성 등을 새겨 넣는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조상들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이러한 청동기를 제작하였던 당사자인 후손의 이름도 명문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청동기 명문은 조상의 공덕을 기리는 가운데 후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이와 같은 위대한 조상의 계보에 속해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청동기의 금속 재질이 지닌 영구불변적인 속성은 이러한 조상과 후손의 관계가 어떠한 변수에 의해서도 지워지거나 훼손될 수 없는 것임을 보증해 주었을 것이다.

     《예기》에 보면 춘추시대 청동 제기의 명문 형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기원전 5세기 위나라 공회라는 인물은 자기 조상들의 제사에 쓸 정(鼎)을 만들면서 그 표면에 명문을 새긴다. 명문의 내용은 위나라 군주가 공회에게 그의 윗대 조상들이 나라와 임금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찬양하면서 그에게도 이를 본받기를 권면하는 것이었다. 명문에는 공회 자신이 군주가 내린 이와 같은 대명에 보답하고자 명문을 새긴다는 취지의 발언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명문 형식은 사실 서주 초기에 제작된 청동 제기에서 이미 확인된다. 예를 들어 성왕(재위. 기원전 약 1042-1006) 때 제작된 하준(何尊)이라는 제기에 새겨진 명문에는 왕이 이 기물을 만든 당사자인 하(何)에게 훈계하는 내용이 나온다. 준(尊)은 제사 때 사용하는 술그릇의 일종이다. 성왕은 하에게 그의 조상들이 이전 왕조인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왕은 이처럼 위대한 조상들을 본받아 하늘을 위하여 공훈을 세울 것을 하에게 명하면서 30붕의 패화를 하사한다. 하는 왕에게서 하사 받은 패화를 이용하여 자기 아버지의 제사에 쓸 제기를 제작했다는 내용이다.

     주나라 때 제작된 청동기 명문에는 추효(追孝)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죽은 조상의 공덕에 효도로서 보답한다는 의미이다. 죽은 조상에게 바칠 제기를 만들고 그 표면에 그가 이룩한 공훈을 기록하여 자자손손 명맥을 이어나가는 것은 추효의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 실에서는 전국 성씨들의 족보를 자유 열람할 수 있다. 이 수많은 족보들의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 있는 추효의 현장이 실감난다. 인적이 드문 열람실 안에서 홀로 떨어져 앉아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기록된 족보를 손가락으로 꼼꼼히 되짚고 있는 노년의 후손들에게 이 거대한 뿌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변화의 바람이 조상을 향한 집념의 물줄기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주목할 일이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상나라 수렵, 목축, 제사를 통해서 본 삶의 세계 구축과 신, 인간, 동물의 관계〉, 〈상왕조의 인간희생제의에 관한 연구: 전쟁, 도시, 위계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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