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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양심의 이름으로 괴롭히는, 구원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news  letter No.561 2019/2/12      

 


  
 

 

 


      즐겨 보는 웹툰 중에 인간 속에 섞여 사는 용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있다. 이들의 본체는 거대한 모습으로 하늘을 날며 불과 물, 지진과 해일 등을 다스리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지만, 평소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인간과 마찬가지의 희로애락을 지닌 채 살아간다. 특이한 것은 이들에게 양심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신통력이 떨어지고 마음 뿐 아니라 전신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앓아눕는다. 흥미롭게도 용들의 이 양심이란 사회적으로 합의되거나 객관적으로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개체마다 각기 다른 주관적 기준에 따라 작동된다. 가령 이런 식이다.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인간친구에게 오만 민폐를 끼치고도 아무렇지 않던 용족 청년이 인터넷 게임 중 무력화시킨 상대 캐릭터로부터 약자를 괴롭힌다는 비난을 받고 앓아눕는다거나. 보행 중 언쟁이 붙은 난폭 운전자를 물리적으로 위협하여 굴복시키고도 당당했던 기 센 용족 누나가 남동생의 친구들이 처한 난처한 상황을 무마시킬 사소한 거짓말을 하지 못하여 분위기를 더욱 험악하게 만든다거나. 실소를 자아내기까지 하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용들은 자신이 무력화시켰던 캐릭터를 다른 게임 속에서 만나 철저히 보복당한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여 동생의 친구들을 더 큰 곤경에 빠뜨리고는 혼자만 편안해 한다.(초 작가, <용이 산다>, 2013.7.2.~ 네이버 웹툰 연재 중.)

      웹툰에서는 이러한 양심통에 대하여 용족만이 지닌 독특한 성정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사실 이보다 더 인간적으로 양심의 속성이 그려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계속하여 보여지는 용족의 양심통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인간 가정부의 실수를 질책하며 유리잔을 던져 다치게 했던 청소년 용이 당시에는 주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다가, 훗날 인간을 이해하고 호의를 갖게 된 후 뒤늦게 미안함과 가책을 느껴 고통 속에 정신을 잃는다.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 된 아기 용은 다른 사람의 펜이 마음에 들어 생각 없이 가져가지만, 펜의 주인이 사라진 물건을 찾는 것을 보고 가책을 느끼며 고열과 울음 속에 잠 못 이룬다. 물론 그들의 증세는 가정부의 ‘괜찮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발적으로 펜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을 때, 회복된다.

     양심(良心).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인간에게 그것은 생래적인 것일까 아니면 학습되는 것일까. 맹자는 생래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성(人性)의 단서[사단(四端)]라고 명명했을 때, 이 마음이 없는 자는 맹자에게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시비지심]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부터 부끄러워할 줄 아는[수오지심] 마음이 양심이라는 개념에 맞춤한 듯 보이나, 이와 함께 거론되는 타자에 대한 공감[측은지심]과 더불어 사는 삶의 행동 준칙[사양지심] 또한 앞서 거론한 두 마음에 선후가 되어야 마땅한 마음이다. 타인의 행위와 감정을 관찰할 때 활성화된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가 뇌의 섬엽(insula)을 매개 삼아 인접한 감정중추인 변연계(limbic system)를 자극함으로써 타인의 상태를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느끼게 한다는 복잡한 신경학적 이론을 빌려오지 않아도, 인류가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회생활 속 생존의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동료를 포함한 타자에 대해 공감능력을 발달시키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인간에게 이 마음이 동일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현격히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기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끊임없이 가르쳐왔다. 네가 받고자 하는 대로 타인에게 행하고(누가복음 6:31), 나를 위하는 만큼 남을 위하라고(쿠란). 자기 자신을 남의 입장에 놓아 보고(법구경 10:129), 내가 고통스러운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고(마하바라타 113:8). 절대로, 절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논어 위령공편 23). 황금률(黃金律)이다.

    황금률과 공감, 그리고 그 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양심과 가책. 이들을 종교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이다. 기독교적 전통에 의지하여 ‘종교의 본질’을 ‘직관과 감성’이라고 이야기했던 슐라이어마허조차도 흔한 오해와 달리 도덕을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가 비판했던 도덕이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신의 의지’와 ‘선의 이념’을 발견하여, ‘의무의 체계를 발전시키고 무제약적인 힘으로 행위를 명하며’ 혹은 ‘금하기도’”(김승철, 「슐라이어마허의 종교관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종교와문화』 8, 2002, 9쪽) 하는 것, 그저 그것이었다. 의무를 힘으로 명하는 ‘외부로부터의’ 의지이자 이념일 뿐이었다. 내재화되지 못한 외물은 직관과 감성에 포함되지 못한다. 이는 바꾸어 말해 의지와 이념이 내재화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그 의무를 명하는 주체가 내 밖의 신, 나를 꾸짖는 신, 나와 분리된 신이 아니라 내 안의 신, 내 안을 비추는 신, 나와 하나 된 신이라면, 도덕은 직관과 감성의 흐름에 편승하며 끝내 종교 그 자체라고 말할 수조차 있게 되는 것이다. 공감과 양심이 바로 그곳에 있다. 명하여 두렵게 하는 곳이 아니라 울리고 찔러대어 아프게 하는 곳. 양심은 두려운 게 아니라 아픈 것이다. 양심통은 용족의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래서 인위적인 가사(假死) 체험의 후유증으로 과거 자신들이 타인에게 저질렀던 가해를 자각하고 두려워하다 끝내 아파하며 용서와 구원을 찾아 나섰던 치기어린 의대생들의 이야기(영화 <Flatliners>, 한국어 제목 <유혹의 선>, 조엘 슈마허 감독, 1990)를 나는 종교영화로 분류한다.

     신애(전도연 분)의 아이를 살해했던 학원장 도섭(조영진 분)을 그 누구도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의 가해의 대상 앞에서 구원받았음을 말하는 그에게서는 그 어떤 아픔도, 아픔의 흔적조차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히려 주변에 있다. 신애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의 곁에 함께 하고자 했던 종찬(송강호 분)과 이웃들이 신애를 구원‘한’ 주체이자, 그 공감의 마음과 행위로 인하여 도리어 스스로 구원‘받은’ 객체들이다.(영화 <밀양>, 이창동 감독, 2007.)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내 마음은 접질린다. 도섭이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였다면, 그것을 오롯이 구원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제 그는 길게길게 아파해야만 할 터인데. 한때 그런 적이 있다. 누군가와 분쟁이 일어났을 때 꼭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했다. 이러이러한 것이 너의 잘못이다, 라고 그에게 인식시키고 싶어 했다. 이후의 사과와 용서는 필요치도 않았다. 그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식하기만 하면, 그의 내면 속에 진실의 빛이 밝혀지는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미안할 테니까. 아플 테니까. 아. 나는 잔인했다. 법과 제도로써 징벌(懲罰)하는 게 아니라, 양심과 가책으로 단죄(斷罪)하려 하였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인간됨을 되찾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진정으로 구원케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잔인했다. 나의 구원은 반드시 아픔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종교는 황금률을 이야기한다. 황금률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깊이 각인되어 양심을 일깨우는 무시무시한 잣대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밖에 있지 않다. 오직 내 안에 거하여 내 안을 비추고 울리며 나를 안으로부터 찔러댄다. 아프게 한다. 종교는 인간을 회개시킨다. 인간을 참회하게 한다. 그래서 종교는 잔인하다. 영화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팀 로빈스 감독, 1995)의 주인공 매튜(숀 펜 분)는 사형집행을 앞두고 헬렌 수녀(수잔 서랜든 분)와 함께 한 6일의 시간 끝에 회개하였다. 회개하였으므로, 그는 더욱 괴로웠다. 이전에는 그저 죽음의 형벌이 두렵기만 했으되, 이제는 죽음의 두려움에 더하여 본인이 살해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 대한 죄의식과 미안함으로 아프기까지 했으니까. 잔인한 일이다. 종교는 죄인을 회개시키지만, 회개는 당사자를 오히려 내면의 고통으로 인도한다. 구원의 순간에 그는 새롭게 자각된 양심이라는 고통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가장 순결한 영혼이 되어, 가장 고통 받으며, 그렇게 구원받는다. 구원의 속성. 내면의 통증, 바로 양심통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종교의 속성. 신(궁극적 실재)과 내가 하나이고 타인과 자아가 하나인 바로 태초의 자리에서 직관과 감성으로 세상 모든 존재에 공감하고 그들과의 미분화 상태를 경험하는 것. 아파하고 감내하는 것. 그래서 다시, 종교. 양심의 이름으로 괴롭히는, 구원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너, 참, 징그럽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전환기 민간 불교경험의 양태와 유산〉, 〈참법(懺法)의 종교학적 기능과 의미〉, 〈조선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 〈전통시대 한국불교의 도첩제도와 비구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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